"아이 키우느라 심심하지 않냐"고 묻는 너에게
오마이뉴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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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7 15:40
"너는 집에서 뭐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기분은 좀 의아했지만 생활방식이 다른 친구에게 묻는 형식적인 질문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날 나는 그 친구로부터 한 마디 더 들었다.
"그건 네가 직장생활 안 한지 오래돼서 그래."
그 이후에 어떻게 대화를 이어 갔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 기회를 틈타 나도 역공을 하기는 했다.
"너는 너 와이프가 애 어떻게 키우는 지 모르지? 그러니 그런 말을 하지."
사실 생각보단 감정이 앞서 나갔다. 뱉고 보니 유치했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안 한 것보다는 조금 후련했다. 그 친구의 부인은 나랑 같은 처지의 전업주부. '애 둘 키우는 아내를 둔 녀석이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니?'가 그 말을 내 뱉은 본 의도였다.
5년 전만 해도 나는 그들과 같이 사회인으로 분류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가끔씩 만났어도 그런 기분을 느끼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나의 기분을 정확히 설명해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난 기분이 안 좋았던 걸까?
20대 중반에 취업해서 30대 후반까지 일했다. 15년 정도 일하며 수입도 비교적 괜찮았다. 내 삶의 공간도 스스로 조금씩 넓혀 갔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여행이나 취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30대 후반, 생에 처음으로 아내인 동시에 예비엄마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오랫동안 커리어우먼을 내 자리로 여기며 혼자 열심히 살아왔던 터라,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로망 또한 있었다. 게다가 남편은 내가 가정을 지키길 바랐다. 남자는 일하고 여자는 가사와 육아를 담당한다는 이전의 방식을 답습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둘 중 하나는 생계를 책임지고, 한 명은 아이를 돌보는 일에 충실해야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 역시 이에 동의했다. 결혼과 동시에 임신한 나는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삶을 중단하고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기 위한 내 인생의 리포지셔닝을 감행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나갔다. 육아하면서 안 지쳐본 엄마가 어디 있겠으며, 가사 일을 도맡으며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가'라는 질문을 안 던져본 주부가 어디 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쁜 딸에 비교적 이해력 넓은 남편 덕에 행복했지만,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고 꺼림칙하게 남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전적으로 가사를 돌보는 '전업'의 주부로 사는 것. 그것이 나와 내 인생에 주는 가치의 '확신'에 관한 문제였다.
누군가 가끔 나에게 '집에서 뭐하냐'는 질문을 던질 때, 육아라는 거대한 임무와 빨래, 청소, 요리 같이 티도 안 나면서 피할 수 없는 고전적인 영역의 일들을 거론하기엔 뭔가 찜찜했다. 스스로 움츠러들기도 했다. 때론 '밥하는 아줌마'와 같은 낡은 이미지를 유머인 양 차용하기도 했지만, 밤이 되면 '나는 누구인가'라며 대답 없는 질문을 반복했다. 참 아이러니 한 건 어느 누구도 그 영역들에 대해 대놓고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 그 영역을 주업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 혹은 평가는 중요성과 별개였다.
만일 그런 대답이 아니라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거론하거나, 재취업 준비 중이라고 말한다면 그나마 자기계발에 게으른 아줌마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나인투식스(9 to 6)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 같은 '일'을 한다고 하면 경제 인구에 포함돼 '슈퍼우먼'으로 업그레이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회 생산성에 기여하는 여성으로 바뀌는 거다. 이렇게 보면 전업주부의 세계에도 마치 피라미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 벌지 않고, 짬내어 운동과 독서와 글쓰기를 하는 나는 2단계의 자기계발형 주부일까?
고백하자면 나 스스로도 여전히 이런 피라미드형 인식에 자유롭지 못하다. 1단계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 되고 2단계로는 뭔가 부족하고, 3단계쯤에라도 이르러야 마치 가족을 위한 누군가가 아닌, 내 인생을 제대로 찾은 듯한 느낌을 받는 거다. 어쩌면 질문하는 누군가보다 내 안의 틀이 나를 더 힘들게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친구가 나에게 물었을 때 가사와 운동과 독서 등을 대충 버무려 대답은 했으나, 사실 그리 당당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답하면 돌아오는 말은 대략 이렇다.
"좋겠다. 시간 많아서. 너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어서."
여기에서 또 하나의 편견이 발생한다. 운동하고 책 읽는다고 하니 시간이 많단다. 단순히 부러워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에 쫓기며 바쁜 것을 정상으로 해석하는 고정관념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일이라도 한다고 말해야 상대방과 같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또, 아이 돌보고 가사에 바쁘다고 하면 '답답하지 않느냐', '일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 아닌 질문을 듣고 허탈해 한 적도 있다. 직장 생활할 때 바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지는데, 가정주부로서 바쁘다는 것은 왜 수많은 질문을 동반해야 하는 건지. 각자 서있는 자리가 다르다는 걸 새삼스레 느낀다.
가정이 삶의 중심적 현장인 엄마와 주부들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은 공감의 차원에서 던져지기보다 '다름'에 방점이 찍힌다. 이럴 경우, 이런 질문들은 문장 자체에 내재된 의미를 넘어 다른 뉘앙스를 담게 된다. 나는 얼마 전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해주는 단어를 알게됐다. 내가 친구의 질문에 예민하게 된 이유, 바로 '타자화'이다. 특정 대상을 다른 존재로 돋보이게 함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말이나 행동. 내가 그 때 느꼈던 건 다름을 넘어선 '분리'였던 것이다.
주부와 엄마는 '상상 이상의 역할'을 한다
주부 혹은 엄마의 역할은 그 가치와는 별개로 쉽사리 보여지고 평가된다. 사실, 주부나 엄마라는 역할을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가사일은 들여다본다고 확연히 티가 나는 노동이 아니다. 행복과 보람으로 포장되어 있을지언정 보이지 않는 고충이 많다. 하지만 주부 혹은 엄마라는 자리는 힘들다고, 억울한 일이 있다고 사표를 내던지기 어렵다. 엄마를 그만두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면하기 매우 어렵다. 그것이 나 같은 엄마들이 가진 약점이다.
이런 약점 때문에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사회와 단절된 사람이란 인식과 싸운다. 또 바깥 활동을 이어나가며 불굴의 의지로 버텨야 한다. 내 경력을 찾기 위해 나왔다 가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돌아가는 엄마가 많고,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겨도 취업이나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올해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입소문을 타고 많은 이들에게 읽혔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맘충론' 역시 마찬가지다. 거론되는 사례의 사실 여부를 떠나, 벌레라는 혐오스런 단어가 붙는 불명예. 이 불명예가 유독 엄마이자 주부인 여성에게만 따라붙는다는 것만 봐도 이들이 쉽게 타자화되는 취약 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 뭐하냐'는 질문은 결혼을 하고 잠시라도 아이를 키우는 시간을 보내본 모든 여성에게 열려 있다. 궁금함이나 관심의 표현일 수도 있겠으나, 내가 우려하는 건 반어법이 섞여있는 경우다. 질문이 목적이 아니라 반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일 때다.
이렇게 묻는 이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음을 알아야 한다. 남편과 아이가 나간 후 주부들이 무엇을 하는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니 질문 방식을 바꿔야 한다. '바깥' 사회와 대비되어 '안'이라는 의미를 주는 '집'은, 이 질문에서만큼은 편안함과 안락함이 아닌 폐쇄적이고 수동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니, 질문을 던지고 싶다면 '집'이란 단어를 빼고 요즘 어떻게 사는지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구절절 대답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내가 대신 물어보겠다.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지. 아내에게 친절히 물어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