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셀프디펜스의 기술, 최선의 방어법은?
한국여성노동자회는 2017년부터 전국 지부들과 함께 '페미-노동' 아카데미를 개최하였다. '페미-노동'은 여성노동자회가 페미니즘 관점으로 노동문제를 바라보고 재구성하자는 의미를 담아 만든 신조어이다. 올해는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아 "[2018 페미-노동 캠프] 일하는 페미니스트, 싸움의 언어를 찾아서"를 지난 7월 13일부터 2박 3일 동안 숙박교육으로 진행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80여명의 여성노동자, 학생, 활동가 등이 서울여성플라자에 모여 총 5강의 강좌와 토론 및 발표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페미니즘 관련 이해를 높이고, 페미니즘 관점으로 노동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이번 캠프 내용과 참여자들의 에너지를 공유하고자 캠프 참여자의 참여 후기를 총 6회의 연재로 기고한다.
[2018 페미-노동 캠프 후기]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자
대학생 때 마을버스에서 내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적거리는 놈을 만났다. 스스로 꽤 당차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완전히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놈이 내린 후에야 마을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친 후였다. 확 뒤를 돌아 노려본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다못해 옆쪽으로 한걸음 옮기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얼음으로 굳었던 그 상황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왜 내가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했을까 싶은 자괴감, 또 다시 그런 상황이 닥쳐도 여전히 꼼짝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딸만 둘인 집에서 자라며 "남동생 안 갖고 싶냐, 엄마한테 남동생 낳아달라고 해라" 등 이웃의 오지랖 넓은 참견을 숱하게 들으며, 반발심에 학창시절 주변 남자애들과의 관계에서 아득바득 우위를 점하려 애썼고 나를 얕잡아 볼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이러한 성폭력 경험은 더욱 짙은 패배감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남성과 물리적인 힘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인정하고 받아들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상황에 닥치고 보니 나는 얼음 상태로 두려움에 떠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었고 한동안은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나를 더욱 괴롭힌 것은 친구들이나 미디어를 통해 보고 듣는 성폭력 상황이었다. 나뿐 아니라 대한민국 여성에게 성폭력 경험은 너무 흔했고,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나처럼 속절없이 당하고 자책과 두려움, 분노에 시달리고 있었다.
배워서 나 주자, 셀프디펜스 기술
생각해보면 '프리즈'는 너무 당연한 반응이다. 장난으로라도 누군가를 때려본 일도 없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싸워본 일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내가 그 상황에서 얼음이 된 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임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 패배감과 분노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셀프디펜스에 관심이 커졌다.
종종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팁 등을 활용해 성폭력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낭심만 노리세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꼼짝도 못합니다', '싸움은 힘이 아니라 멘탈입니다.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람이 이깁니다' 등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방법인가, 최선인가 싶은 의구심이 일었다. 그야말로 상상 속의 일일뿐 실제 몸을 움직여 해보지 않으니 스스로도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실전(?)에 쓸 수 있고, 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셀프디펜스 기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차에 이번 수업은 단비와 같았다.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강의를 들으며 나름대로 이번 강의에서 좋았던 점과 기억할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것만은 꼭 기억하자!
두 강사 분은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고, 상황별 방어동작을 시범을 보이며 제시해 주셨다. 동작의 빠르기를 조절해가며 세세히 알려주셔서 나 같은 몸치도 동작을 익히는 데 문제가 없었다. 특히 왜 그 방어법이 효과적인지를 설명하며 설득력을 높였다. 이를 테면 앞에서 들어오는 상대의 손공격을 방어할 경우 팔꿈치를 옆으로 들어올리지 말 것, 팔꿈치는 몸 가까이 붙이고 손만 들어 올리는 것이 유리하다는 거였다. 이렇게 해야만 방어 면적을 넓히는 동시에 상대의 손이 내려치게 될 부분은 팔뼈가 되므로 방어하는 쪽보다 공격하는 쪽이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설명을 들으니 '아~ 그렇구나' 깨침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방어동작뿐 아니라 '하지마세요! 진정하세요!' 등 언어적 표현을 동반했을 때 효과가 배가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특히 수강생들이 직접 방어동작을 여러 차례 반복해 보도록 한 점이 좋았다. 공격자와 방어자로 역할을 나누고 바꿔가며 수차례 해보니, 앞서 들은 방어동작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었고, 실제 상황에서 충분히 활용 가능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 수업을 듣기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팁도 얻었다. 셀프디펜스의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이나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는 것, 바로 도망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간 다양한 셀프디펜스 방법을 고민한 적이 많았음에도 정작 도망의 기술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남녀 간 물리적 힘의 차이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 현장을 잘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왜 놓쳤나 싶다.
더불어 도망에도 기술이 필요함을 언급하셨다. 냅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살피면서 사람들이 많은 쪽, 큰 도로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며 도망쳐야 하고, 이를 위해 빠른 판단력과 집중력, 정신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사 분의 말씀 중 또 하나 기억에 남은 것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프리즈 상태를 겪는 것은 공격자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를 이용하여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무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공격자가 흥분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셀프디펜스 기술이라고 하셨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셀프디펜스 기술을 배우면, 과연 공격자(주로 남자)를 물리칠 수 있을까?' 이 수업을 듣기 전에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이었다. 수업을 듣고 나니 이것이 한참 잘못된 생각임을 알겠다. 셀프디펜스는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안전을 스스로 지키는 것, 내가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셀프디펜스의 핵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떨쳐내자고 다짐했다. 강사 분들은 정신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공격자들이 상대를 봐가며 행동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단호한 목소리와 방어동작을 취한다면 공격자도 당황하기 마련일 것이다.
나는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공포감이 극에 달해 한동안 외출을 꺼렸고, 지금도 공중화장실은 잘 사용하지 못한다. 사실 이번 캠프가 열린 서울여성프라자 공중화장실도 밤에는 동행인이 있을 때만 사용했다. 7명이 한 방에서 같이 숙박을 해서 실내 화장실이 부족했는데, 혼자서 공중화장실 앞까지 갔다가 심장이 쿵쾅거려서 결국 방으로 되돌아왔다. 사무국 분들께는 이런 이야기도 부끄럽지 않게 하고, 함께 가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용무가 급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이번 수업으로 인해 내가 가진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미약하나마 깰 수 있었던 것 같아 흐뭇하고, 앞으로도 이 부분에 노력을 쏟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번 수업이 좋았던 만큼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기엔 공간이 협소했다. 전원이 방어동작을 실습하지 않고 반씩 나눠 진행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 이론으로 배우는 시간과 실제로 동작을 연습해보는 시간이 거의 1:1이었는데 이점이 좀 아쉬웠다. 기회가 있다면 더 오랜 시간에 걸쳐 셀프디펜스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
* [2018 페미-노동 캠프] 자료집 다운로드 받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