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2주기, '우연히 살아남기'를 넘어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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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살면서 내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2016년의 5월도 그랬다.

 

당시에 전공수업으로 '범죄사회학'을 수강 중이었는데 마침 제출해야 했던 레포트 주제가 "범죄를 통해 한국사회를 이해하기"였다. 한국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사건을 하나 선택하고 범죄학적 관점에서 사건을 분석하는 과제였다. 교수님은 '화이트칼라 범죄'를 언급하시면서 힘 있는 자들,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범죄(crimes of powerful)에 반영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 것 같은지 생각해볼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중간고사가 끝난 뒤에도 좀처럼 레포트에 쓸 사건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에서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피의자는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했으나 자신이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며 여성에게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답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 발표하였으며, 언론은 강남역에서 '묻지마 범죄'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서울시는 문제 해결을 위해 공용화장실을 남녀화장실로 분리하여 설치하는 계획을 밝혔다. 강남역 사건을 증오범죄(hate crime)라고 부르기엔 아직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어떤 범죄전문가의 인터뷰까지 듣고 나니 비로소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범죄가 이런 거구나.


본격적으로 레포트를 작성하기 전에 현장 답사 차원에서 참여했던 2016년 5월 20일 추모문화제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 포스트잇으로 가득 메워졌다. "혐오가 죽였다", "여자라서 죽었다" 그리고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슬로건과 더불어 "모든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다"라는 구호는 나를 비롯한 분노한 여성들의 입을 트이게 하기 충분했다.

 

구호가 간결하고 직관적일수록 '왜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더 많이 더 자주 인용되었다. 무엇보다 더 크게 말할수록 내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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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그리고 힘에 대해서


나의 분노, 좌절, 무력감, 두려움이 커질수록 더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도 커졌다. 그래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나는 친구들과 더 크게 말하고 더 설치고 다녔다. 그때의 나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페미니즘을 처음 만난 것은 강남역 사건 이전이었으나 페미니스트로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 강남역 사건 이후였다. 그래서 '페미나치'라거나 '메갈련'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이기고 싶어졌고, 작은 승리의 경험이 쌓일수록 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실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만큼이나 페미니즘 내부의 논쟁 또한 굉장히 치열해졌는데, '정체성의 정치'와 피해자 되기의 정치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 간의 불화와 갈등이 골자였다. 확실한 건, 이 싸움은 이기고 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또한, 무엇이 더 올바른 운동인가, 누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의 문제도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들 간의 갈등은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특권을 성찰하지 않는 페미니즘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여성들 내부의 격차와 이질성을 서로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가난한'+'장애'+'여성'인가? 장애 여성은 일주일에 3일은 장애인으로 살고, 나머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가? 이런 식으로 불행을 경쟁하고, 가장 큰 피해자가 가장 올바르다는 논조의 질문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다'.

(중략)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여성주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미체계 중 하나이며, '여성주의자' 역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세상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28쪽)

 

특히 강남역 사건 이후 등장한 "여자만 챙기자"라는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으로서 '여성'을 가정하고 있지만 그 여성범주 안에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여성'은 빠져있었다. "모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다"라는 논리가 '진정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근거를 'female body = 자연적인 보지'라는 공식에서 찾고, '자연적인 보지'와 '인공 보지'라는 이분법을 만들어 전자에 '정상성'이라는 위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분법은 페미니즘이 그동안 비판해왔던 '성기환원주의'와 '성별이분법'은 오히려 강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고, '정상적인 보지'를 진정한 여성의 자격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MTF 트랜스젠더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번은 도대체 '정상적인 보지'란 어떻게 생긴 건지 궁금해서 구글에 이미지 검색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연관검색 추천으로 뜨는 정보가 바로 '이쁜이 수술'이었다. 그러니까 비퀴어 여성(시스젠더 *지정성별과 본인이 생각하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이성애자 여성)들에게 '소음순을 이쁘게 만드는 수술'을 권장하는 광고였다. (하필 또 수술 이름이 '이쁜이'인 이유는 뭐란 말인가. 사람들은 왜 보지를 보지라고 말하지 못하고 '소중이'라든가 '이쁜이'라고 하는 걸까.)

 

작년인가 논란되었던 '유두크림' 광고가 떠올랐다. 핑크색 유두를 만들어주는 크림을 바르라는 것이다. 여성이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유두나 성기(클리, 보지)조차도 이 땅에서는 '미용', '뷰티' 성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근거는 "남성 파트너가 보기에 그게 더 매력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인 보지' = '이성애자 남성 파트너가 보기에 매력적인 보지'= '진정한 여성의 자격'이라는 공식이 유지되는 한, 비퀴어(시스젠더-이성애자)여성들은 소음순을 '이쁘게' 성형하는 '성기 수술을 하라'는 말을 듣고, MTF 트랜스젠더 여성들에게는 '성기수술을 했으니 진짜 여성이 아니다'라는 말이 돌아오게 된다.

 

어느 쪽이든 매우 문제적인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 어떤 사안이 더 근본적인가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누구의 문제가(혹은 고통이) 더 근본적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사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들처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할 위협이 없지 않냐'라는 질문은 "불행을 경쟁하고 가장 큰 피해자가 가장 올바르다"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 애초에 여성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고정불변하고 단일할 수가 없음에도 불행과 고통에 위계를 부여하고 우선순위를 정한 뒤 '가장 피해받은 사람임'을 경쟁해서 얻어낸 권력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즉, 권력과 폭력에 저항해온 게 페미니즘의 역사인데, 만일 페미니즘이 스스로 권력이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미니즘이 주장해온 '임파워먼트(empowerment)'에서 파워(power)는 어떤 힘인 걸까? 우리가 더 강해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우리'라고 해도 되는 걸까? 싸움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어째서 그 싸움으로 얻어낸 힘이 해부학적 성차에 근거한 '성별이분법'을 해체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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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몇 달째 '미투'가 이어져 오고 있음에도 제대로 수사받거나 처벌 받은 가해자들은 손에 꼽는 상황에서, 남성이 피해자이고 여성이 가해자인 몰카 사건의 경우 단 며칠만에 수사가 척척 이뤄졌다. 심지어 경찰은 가해자를 포토라인에 세우기까지 했다. #동일범죄_동일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에 30만 명 이상의 서명이 모인 이유다.

 

사실 동일범죄에 대해 동일한 수사와 처벌을 하는 것은 페미니즘까지 가지 않더라도 너무나 당연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솔직히 이렇게 상식과 기본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체성의 정치와 '모든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다'라는 말을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글을 쓰면서도 고민스럽다. 이런 비판이 만에 하나 백래시의 논리로 이용되면 어떡하나 걱정될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감각에 의지하여 '분노'라는 감정이 동력의 전부가 되는 순간 쉽게 내가 소진(burn-out)되어버리거나 자기파괴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분노 말고 다른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서라도 나의 페미니즘을 갱신할 필요가 있었고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감각을 넘어서야 했다. 무엇보다 강남역 이후 내가 임파워먼트를 통해 갖게 된 힘이 타자에 대한 '윤리적 폭력'이 되지 않으려면 더 이상 '우연히 살아남았다'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우연히 살아남은 자들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기 위해 사회에 목소리를 내던 정치적 순간은 분명히 "살아남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즉 삶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순간, 죽음의 공동체를 통해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적 순간은 사라지고 타자를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동일성의 정치학으로 미끄러져 갔다. (권김현영 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67쪽)

 

결국 강남역 이후의 페미니즘을 갱신한다는 것의 의미는 '너에 대한 감각'을 깨우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라는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처럼 페미니즘의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너'에 대해 생각하고, '너'의 곁에 다가가는 과정 속에서 강해졌다고 믿는다. 나는 '너'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너'와 같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너'를 묻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강해져 왔다.

 

여성이라고 해서 결코 동일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입장과 관점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고정불변하고 자연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좌절시키는 무거운 현실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모르는 너'에 대한 감각을 깨우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너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한, 페미니즘이 갱신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한없이 강해질 거라고 믿는다. 내가 세계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도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윤리적 태도는 카바레로가 제시하듯이 "너는 누구인가?"를 묻되, 완전한 대답이나 최종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 질문을 계속 제기하는 데 있다. 내가 질문을 제기한 타자는 그 질문을 만족시킬 어떤 대답에 의해서도 포착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질문에 인정욕desire for recognition이 존재한다면, 그 욕망은 욕망으로서의 자신을 계속 살려둔 채 해소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이 순간 나는 너에게 말걸기를 중지하거나 네게서 오는 메시지를 전달받지 않게 된다. (윤리적 폭력비판- 자기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역,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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