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 문자, 스토킹... 딸이 데이트폭력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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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밤도망을 감행했다. 아버지의 무능과 오랫동안 이어진 음주 후의 폭력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졌다. 엄마가 아버지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내용이었다. 늦은 밤 동네 곳곳에서 엄마가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어른들의 '카더라 통신'이 쏟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 사실이다. 가난과 술과 폭력에 무차별적으로 시달리던 엄마는 의심하지 않고 유혹의 손을 덜컥 마주잡았다. 용기를 내어 지옥의 집을 탈출했다. 열한 살짜리 딸 아이가 발걸음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아이가 매달린 치맛자락을 가위로 자르고 도망쳤다. 살기 위해서였다.

 

벗어날 수 없는 가난과 이틀이 멀다하고 취해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손찌검하는 남편. 그 속에서 단 하루라도 더 살아야하는 이유가, 엄마에겐 없었다.

 

엄마가 떠나고, 한동안 동네를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무성한 소문들은, 차츰 나에게로 옮겨와 족쇄가 되기 시작했다. 어쩌다 웃음만 소리 내어 웃어도 "지 엄마를 닮아 아무데서고 끼부린다"는 지적을 받았다.

 

무엇을 입든 양다리를 조신하게 붙여 앉았다. 셔츠 단추는 목 끝까지 잠궈 입는 것이 당연했다. 손톱에는 투명 매니큐어조차 바를 수 없었다. 새빨간 립스틱은 만져볼 수도 없는 신기루였다. 여자는 조신하고, 단정하고, 순하고, 착해야 한다는 삶의 지침들이 쏟아졌다.

 

나를 가둔 삶, 딸은 다르길 바랐건만...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내가 엄마 유일한 분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행해지는 징벌과 폭력은 잔인했다. 누구보다 나다운 삶은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때때로 내가 선택한 색으로 나를 치장하고 싶은 자유로움을 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포기와 시간과 인내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나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 점점 희미해지는 날들이 계속 되면서, 나는 세상이 마구 정해놓은 기준에 부흥하고자 무채색의 삶을 택했다.

 

삼십대의 어느 날, 동료 직원이 물었다.

 

"주임님, 여자가 서른이 넘어서도 화장을 하지 않는 건 세상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이후 마흔이 넘었을 때, 어느 컨설팅회사 대표는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김 과장, 여자 마흔 넘었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이제 큰~일 났다."

 

내가 화장하지 않는 게 게으르다고 탓하는 직원에겐 "저마다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다르지 않겠느냐"고 제법 고수 같이 답했다. 컨설팅회사 대표에겐 "그럼 이제 대표님 사모님도 세상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겠다"고 대꾸하고 치워버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일하는 여성을 외모로 단정지을 것인지 몹시 화가 났다.

 

결혼을 하고 이듬해 첫 딸을 낳았다. 나는 딸아이의 삶을 아무것도 규정하지 않았다. 나의 사견과 세상의 편견들 중 그 어느 것도 아이와 결부시키지 않으려 했다.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자 했다. 이 아이에겐 살고 싶어 도망친 엄마가 없으니, 눈치를 보거나 주눅들지 않길 바랐다. 자신을 찾는 걸 포기하거나 나중으로 미루다 영영 잃어버리지 않길 바랐다. 

 

아이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는 삶을 원했고, 곧 외교관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이의 열정이 약간은 미치지를 못해 무역을 택했다. 무역을 전공한 후 해외영업 전문가가 되고자 했다.

 

아이는 삶의 구김살이 없었다. 보기에만도 시원한 푸른색 계통의 줄무늬 오프숄더 원피스를 예쁘게 입고 다녔다.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캔 맥주 꾸러미를 들고 와 제 아빠를 찾기도 했다. 아이는 당당하고, 예뻤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나는 생애 처음 유쾌한 삶을 맞이할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 평온함이 찾아온 거다. 아이의 2년 반짜리 연애가 데이트 폭력으로 점철되기 전까지, 앞으로 내 남은 삶이 계속 행복할 거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가해자의 주장은 일관됐다. '감히', 딸 아이 측에서 먼저 이별을 통보했다는 데 화가 났다고 했다. 2년 반을 아무 일 없이 만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변했고 이별을 통보했다는 거다. 그 사실을 본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고, 딸 아이를 포기 할 수 없다고 했다. 300여 통이 넘는 욕설 문자들이 매일같이 딸 아이의 휴대전화에 쌓였다.

 

외출하는 도중, 아이 앞에 나타나 아이를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고함을 지르고, 주먹 행세를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아이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위험과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나중에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여러모로 상황이 많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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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통 욕설문자, 길거리 폭력... 이별통보의 결과

 

이 일로 남자아이의 부모를 만났다. 남자아이의 엄마는 나에게 뻔뻔하게도 부탁했다. '아들이 취직을 할 때까지만 마음잡을 수 있게, 이 같은 행동을 멈춰달라'고 했다. '여자는 직장생활하다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면 그만이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다'며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내 딸 덕분에 그의 아들이 마음잡고 취직준비를 하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했다. 취직이 성사될 때까지만 딸의 마음을 되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외교관이 꿈이었다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차선의 길을 찾아 오늘하루도 열심히 자신의 미래를 쌓아가는 내 아이에게, 그들은 삶의 안정이 보장된 공무원 여자를 원한다고 말했단다. 여자는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이며, 아이가 영어를 잘하니 영어교사가 되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라고 했단다. 그러면 그의 아들과의 결혼도 허락하겠다고.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며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나로서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들 투성이었다. 설레이고 행복하기만 해도 날들이 모자랐을 내 아이의 연애가 끊임없이 자격을 요구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뭐 그리 대단한 아들이라고 남의 자식 인생까지 참견하는가 싶었다.

 

남자아이의 엄마는 '순하고 여린 얼굴을 해가지고 어떻게 그런 독한 결심을 할 수 있느냐'며 급기야 내게 화도 냈다. 마치 이 일이 벌어진 게 전부 내 아이의 잘못인 것처럼. 나는 '2년 반 동안 연애를 한 것이 아니라 자원봉사를 한 격이 아니냐'며 화를 냈다.

 

자소서를 대신 써주고, 온라인 테스트와 강좌 출석을 대신 해주고, 영어학원을 함께 다녀주고, 발음과 회화와 면접 시뮬레이션을 대신 혹은 함께 하면서, 아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막돼먹은 노동을 치루고 있던 것이다. 남자아이는 내 딸의 마음을 십분 활용하면서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둘은 결혼을 할 것이므로, 여자보다 남자가 더 잘 되어야 남자가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으므로, 둘이 약속한 미래를 위해서도 서로서로 도와주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폭력 가해자가 항변하기도 했다. 먼저 변심해서 자신의 아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내 딸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남자 아이의 엄마는 나에게 화를 냈다.

 

누가 규정했을까. 남자가 여자보다 더 잘 돼야 결혼생활이 행복하다고, 여린 여자는 공무원을 하거나 영어교사가 되는 것만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누가 감히 규정했는가 말이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책임지느라 2년 반 동안 수모 당했을 딸 아이가 안쓰러웠다. 이별할 이유가 없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이의 폭력성 앞에 몸서리 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만약 당신의 딸이 내 딸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어땠을 거 같냐, 당신의 바람처럼 남자가 취직할 때까지 헤어지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느냐,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 게 혹시 집안 내력은 아니냐. 이렇게 물었을 때, 남자아이의 엄마는 내게 한마디 던졌다.

 

"기집애가 옷이라도 참하게 입고 다녀야지, 마치 다 보란 듯이 그러고 다니니 남자들이 침 흘리며 엉켜붙지 않겠느냐", "처음부터 당신 딸은 이만큼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삿대질도 했다.

 

"잘 됐습니다. 내 딸은 내가 건사하겠으니, 당신 아들 침이나 닦아주시죠."

 

그날 나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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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넘은 나, 달리 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해야 이 땅에서 여성으로 자신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절망스럽다.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집에서 도망쳐 자신을 보호한 나의 엄마는 아직도 죄책감에 휘둘리며 살고 있다. 나는 행여 '남자나 후리고 다닌다'는 말을 들을까봐 수십 년 동안 우유부단하게 살아왔다. 

 

사람이 좋아 달려갔더니, 사랑의 본질을 무참히 훼손당한 나의 딸은 또 어떠한가. 불한당 같은 사람을 만나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여자가 제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이루어 나가면 뭔가 큰일이라도 생기는 걸까.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2017년 9월 우리 가족은 생애 처음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동안 입으려고 그린색 린넨셔츠를 하나 구입했는데, 온 가족이 야단법석이었다. 난생 처음 검정과 회색이 아닌, 그것도 안이 은은하게 비치는 옷을 샀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해오던 일이 아니다. 

 

여행지에서 나는 줄곧 그린색 린넨셔츠를 입고 다녔다. 단추 서너 개를 그냥 풀어놓은 채 걸어 다녔다.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닌다고, 누구를 꼬시려고 단추를 풀어 헤치고 다니느냐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았다.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가볍고 신났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많은 게 잘못됐다. 여자로, 엄마로, 딸로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먼저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여자라서 제한이 가해지는 수많은 상황 앞에서 부당하다고 말해야 했다. 나는 그저 숨기에 바빴다. 모든 질문에 답하길 스스로 포기하며 묵비권만 행세했다. 그러지 말고, 여성이 받는 질문에 대한 사실적 대답을 쉼없이 만들어야 한다. 웅크려 앉아 고스란히 나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어쩌면 스스로 여성이라는 한계를 지어놓았던 건 아닐까. '아니다'라고 쉽게 답할 수 없다. 지레 겁먹고 은둔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피해자다운'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내 나이 마흔이 넘었다. 지금부터 다시 살아보기로 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탁월한 조건을 십분 발휘해, 더 이상 여자가 똑같은 질문을 받지 않는 세상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태우면서 엄마와 나 그리고 딸이 앞으로 어깨를 쫙 펴고 살 수 있도록. 그린색 린넨셔츠가 내게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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