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잡년'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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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럿라이드 액션을 지지합니다. 슬럿라이드가 차용하고 있는 운동은 2011년 한국에서 있었던 '잡년행진'입니다.

 

'잡년행진'은 2011년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 대학에서 열린 안전포럼에서 한 경찰관이 "성폭행을 당하지 않으려면 여자들이 슬럿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촉발되었던 '슬럿워크'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잡년행진'은 캐나다라는 '서구 선진국'을 따라한 것이 아니라 캐나다로부터 촉발된 전 세계적 운동에 '함께'했던 것이었습니다. 작년에 낙태죄 폐지를 내세우면서 들불처럼 일었던 '검은시위'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물론 한국에서도 '잡년행진'이 열린 '독자적(이지만 전혀 고유하지는 않은)' 맥락은 있었습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바로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입니다.

 

MT에서 여자 동기를 집단 성추행하고 몰카를 찍은 세 명의 고대 의대생 처벌에 대한 고려대학교의 미온적인 태도에 항의하면서 '고대 앞 슬럿워크 1인 시위' 등이 일어났고, 이는 이어서 한국의 슬럿워크, 즉 잡년행진으로 이어졌죠.

 

2011년 당시 잡년행진을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잡년행진'이 "나의 몸은 나의 것"과 같은 근대적 사적 소유권 개념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하고, 페미니즘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공모하는가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82호 크레인에 올라가 한진에 대항하고 있었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공적인 몸'과 잡년행진에 나선 여성들의 '사적인 (혹은 사적 소유권을 강조하는) 몸'을 비교하면서, 잡년행진이 문제적이고 퇴행적이라고 비판했지요.

 

그러나 이 비판은 두 가지 지점에서 틀렸습니다. 첫째, 여성들이 '나의 몸은 나의 것'을 외친 것은 바로 그 사적 소유권이 이 시대의 지배적인 정치체제인 (그리고 물론 자본주의의 정치적 판본인)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시민권이 그 '소유권/재산권'에 기반하고 있을 때,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퇴행'이 되려면 '성취'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여성'이 아니라 '노동자'를 대표할 때에야 비로소 '공적인 몸'으로 승인받았던 김 지도위원이 최근 페미니즘 의제, 특히 폭력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둘째, 여성들의 운동은 '내 몸 하나 챙긴다'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이미 성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나의 몸'이란 내 개인의 문제도 아니고, 따라서 개인의 몸만을 재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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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잡년행진은 '잡년행동'으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현대차 협력업체 성희롱 사건(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2009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사내 하청업체 관리자 2명에게 수차례 성희롱당하고 고발하자 해고된 사건) 관련 시위 등을 조직하면서 활동을 확대해 나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2011년에 진행되었던 잡년행진의 모든 문제의식이나 이후 잡년행동이 진행한 모든 프로젝트에 동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이런저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어떤 프로젝트들이 있었고,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는지 건건이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한번 다시 리서치 해보아야 겠네요.)

 

하지만 기억되고 어떤 식으로도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운동이고, '슬럿'의 전유는 여전히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입어도 '슬럿'이 되는 세계에서 '슬럿처럼 입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여기서 싸우고자 하는 것은 '슬럿처럼 입어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그 인식론과 그 말 자체이기 때문이죠. "잡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슬로건이 지시하는 바는 정확하게 이것입니다.

 

"대체 슬럿처럼 입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자체가 오히려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슬럿의 이미지'에 갇혀 있는 질문 아닐까요?

 

슬럿라이드에는 역사와 맥락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성 역시 있지요. 2017년의 슬럿라이드를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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