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 공주' 아름이? "오빠들이 나보다 못하는데 무슨..."

오마이뉴스 0 6,218

"여자가 무슨 공대냐."

"여자가 박사하면 결혼 못 해."

"애 키워야 하는데 포닥(박사 후 연구원)을 어떻게 해."


페이스북 페이지 '이공계 내 성차별 아카이빙 프로젝트'(@STEMGenderEquality, 관련 링크)에 제보된 이공계 내 성차별 발언의 일부다. 한국 사회 대부분의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이공계는 여전히, 그리고 유난히 여성에게 장벽이 높다. '여자는 수학·과학을 못한다'는 편견 어린 시각을 간신히 극복한 뒤에도 이공계 여성들은 '남초' 사회가 가하는 각종 대상화로부터 버텨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산다.


'걸스로봇'은 이러한 현실에서 이공계 여성의 '생존'을 돕는 소셜벤처다. 2015년 11월 만들어져 여성 과학자들이 주축이 된 세미나를 열고 이공계 여학생들의 학술 세미나 참여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공계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엔 심상정 대선후보를 초청해 특별대담을 열어 여성정책 전반을 논의하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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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나 '공대 아름이' 되겠네


걸스로봇 이세리 크루는 공대에서 페미니즘보다 로봇을 먼저 접했다. 공대는 지독한 '남초' 사회였지만 입학 당시엔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가 많은 곳에서 여자로 살다 보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입학 전엔 '공대 아름이'란 말이 기분 나쁘지도 않았어요. 그러네, 나 공주까진 아니어도 '공대 아름이'가 되겠네. 그 정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걸리는 순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우선 랩실의 군대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이 '다나까' 말투를 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랩실엔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 남학생들도 꽤 있었는데 이상하죠."


랩실 남자 사람들은 '족구'를 하며 친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연스럽게 운동장과 멀어진 여학생들에게 족구는 친목의 매개체일 수 없었다. 사진을 좋아해 카메라를 들고 나가 운동하는 남학생들의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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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으다 보니까 여자가 없는 거예요"


'공대 아름이'로 살던 세리는 그저 로봇이 좋아 참여한 '로봇공학을 위한 열린 모임'(로열모)에서 얼떨결에 걸스로봇의 탄생부터 함께하게 됐다. 로열모는 페이스북을 통해 로봇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오프라인 행사를 여는 단체다.

 

행사를 기획하며 연사를 찾았다. 여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겨우 찾아낸 사람이 바로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였다. 행사를 마무리하며 누군가 말했다. "우리 '걸스로봇' 같은 것도 해보자" 세리의 중심축이 로열모에서 걸스로봇으로 기울어졌다.

 

걸스로봇 활동 초창기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세리에겐 결정적인 '페미니스트 모먼트'였다.


"그 전까지 세상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일베는 소수고, 걔네 빼고 우리끼리 가면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생각했는데 그때 알았죠. 내가 소수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사실은 소수가 아니란 걸."


생각해보면 그로부터 1년 전 '메갈리아'의 등장 당시 느꼈던 감정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에 놀랐던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난 여잔데 왜 남자를 욕하는 게 더 소름끼칠까. 여자를 향한 욕에 내가 익숙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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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들이 나보다 못하는데 무슨"


걸스로봇 활동을 계속하며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공부가 됐다. 지원을 받아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도 참여하고,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과 단체를 꾸준히 만났다. 이공계 여성이 처한 현실이 조금씩 보였다. '이공계 내 성차별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수많은 세리'들'이 경험한 일들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이공계엔 소위 '천재'라고 불릴 만한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데 여자애들이 천재성을 발휘하면 그저 '노력했다'로 치부해 버려요. 사실 따지고 보면 열심히 해서 잘하는 것도 능력이잖아요. 그냥 인정을 안 해주는 거죠."

 

이공계에서 여성의 성과는 저평가된다. 남자친구가 도와줬다거나, 오빠들에게 부탁해서 과제를 잘해올 거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오빠들이 나보다 못하는데 무슨 부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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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계를 상상하기

 

세리는 걸스로봇을 만들어가는 참여자이면서 한편으론 걸스로봇의 가장 큰 '수혜자'이기도 하다. 걸스로봇이 수혜자로서의 세리에게 준 가장 소중한 경험은 '다음 단계에 대한 상상'이다. 세리는 걸스로봇을 통해 이공계라는 분야에서 발을 빼지 않으면서도 잘 살고 있는 여성들, 혹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여성들을 알게 됐다.


"이걸 몰랐으면 전 일단 남들 따라서 결혼을 했을 거고 그 뒤엔 아마도 '해보니까 힘드네' 하면서 이공계에서 탈락하는 여성이 됐을 거예요. 이젠 새로운 롤 모델을 봤으니까 저렇게 살기 위해선 내가 지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다음 단계를 상상할 수가 있는 거죠."


다음 단계를 위해 걸스로봇은 이공계를 선택한 여학생들을 타겟팅하고 있다.

 

"장기적으론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여자아이들부터 고정관념에 물들지 않게 해야겠죠. 하지만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잖아요. 일단 '이 길'을 선택한 친구들이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아남아서 위로 올라가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걸스로봇은 최근 활동가 '긱스카우트' 1기를 모집하며 모집 대상을 중학생까지 열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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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약을 먹어버렸으니까

 

세리는 아직 '페미니스트 파트너'를 만나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의 연애를 돌이켜보면 '데이트 폭력'이라 이름 붙일 만한 순간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연애는 전과 같을 수 없다.

 

"'빨간 약'(이전까지 몰랐던 세계를 깨닫게 해준 계기를 비유하는 말)을 먹어버렸으니까 돌이킬 수 없어요."

 

파트너를 붙잡고 일방적으로 페미니즘을 가르치던 처지에서 벗어나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줄 수 있는 페미니스트 파트너를 만나보고 싶다. 그 순간이 자신의 새로운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될 것임을 믿는다.

 

그저 로봇이 좋았던 공대 아름이로 출발해 걸스로봇을 통해 페미니즘을 아는 이공계 여학생이 되기까지, 본인은 무엇을 '아는 페미'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세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개척할 줄 아는 페미. 사실 지금도 운만 따라준다면 이공계 여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운에 운이 겹치지 않아도 이공계에서 여성이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개척할 줄 아는 페미'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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