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채용 면접을 보러간 당신이 뽑은 예상 질문에는 아마도 업무와 관련된 것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줄 답변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면접관의 여성용 질문 리스트에는 엉뚱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결혼은 했어요? 남자친구 있어요? 출산계획은요?' 이름하여 '결남출'.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여성인 당신이 취업이라는 바늘구멍을 뚫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취준페미'라는 말을 들어 본 일이 있는가. 취업 준비를 하다보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말이다. 여성 취업준비생들이 피부로 느끼는 채용 성차별은 그만큼 심각하다. 하지만 그것은 '취준페미'들이 만든 괴담처럼 취급되어 왔다. 취준생들은 채용성차별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권력의 핵심부에서 너무 멀고, 채용과 관련된 고급 정보들은 외부로 잘 유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채용 관련 기준과 점수 등을 공개하라는 요구에 기업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업기밀이라고.
실체를 갖게 된 결남출과 취준페미 괴담
그러다가 지난해 드디어 그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대검찰청 반부패부가 발표한 공공기관 채용비리 수사결과에 채용성차별이 딸려온 것이다.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은 '여성은 출산과 육아휴직 때문에 업무 연속성이 단절될 수 있다'는 이유로 채용에서 배제시키라고 지시했다. 면접점수와 순위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합격권이었던 여성들을 2015년 4명, 2016년 3명 낙방시켰다. 대한석탄공사 역시 2014년 청년인턴을 채용하면서 서류전형과 면접에서 모두 여성에게 비정상적으로 낮은 점수를 주어 여성을 모두 탈락시켰다. 괴담은 정확한 실체를 가진 현실이 되었다.
2018년 봄, 이번에는 금융권에서 터졌다. KB국민은행은 2015년 상반기 채용과정에서 특별한 이유없이 남성 지원자 100여 명의 서류 전형 점수를 여성보다 높게 준 사실이 밝혀졌다. 남성을 채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점수를 조작한 것이다. KEB하나은행은 심지어 최종합격자 성비를 애초부터 남성 4, 여성 1로 정해 놓았다. 결과적으로 여성 지원자의 합격 커트라인은 남성보다 48점이나 높은 불공정한 공채가 진행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채용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관습적으로 퍼져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난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조선시대 기업이냐, 성차별이 웬말이냐
우리나라의 성별임금격차는 OECD 1위이다.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2년 이래 단 한 번도 이 부끄럽기 그지없는 1위를 놓친 일이 없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성별임금격차가 채용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해왔다. 지난해부터 성별임금격차에 항의 하기 위한 3.8세계여성의날 기념 '3시 STOP' 공동 행동-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를 하루 노동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여성은 3시 이후부터 무급으로 일하는 셈. 3시부터 이에 항의하여 하던 일을 멈추자는 의미로 3시 STOP을 내걸었다- 을 주도해 온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올해 요구안에 '결남출 묻지 말고 반은 뽑아라'라는 요구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정부에 채용성차별에 대한 대책을 만들 것을 요구해왔다.
금융권 채용성차별이 터져나왔을 때는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을 꾸려 여성들의 분노를 조직적으로 표출하였다. 많은 여성들은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냐?", "우리는 언제까지 떨어져야 하나?", "여자로 태어나면 그저 누군가의 발판으로만 살아야 하는 건가?", "자다가도 화가 난다. 여자로 태어난 게 죄인가?"라는 말들로 분노를 토해냈다. 인터넷 상에서 모아진 문구들로 구성한 기자회견에서 "조선시대 기업이냐, 성차별이 웬말이냐"라는 문구는 매우 상징적으로 오늘을 나타내었다.
사상이 진보하고, 과학이 발달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행해지는 차별은 조선시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야말로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인 것이다. 국민은행 건물을 뒤덮은 여성들의 분노의 말들은 그래서 더욱 큰 물결로 느껴졌다. 채용성차별에 대한 조직적 분노를 표출하고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은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가 기업의 채용과정 중 성차별 현황을 명명백백하게 조사하여 실태를 파악할 것 ▲채용과 모집에 있어 현행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하는 사업장을 처벌하고, 엄정한 시정조치를 위해 법·제도를 강화할 것 ▲기업은 채용의 전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체계적 차별의 시작, 채용 성차별
이어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임금차별 타파의 날'-남성정규직 월평균임금대비 여성 비정규직 월평균임금을 1년으로 계산한 날. 여성비정규직 월평균임금은 남성 정규직의 37.7%로 2018년 임금차별 타파의 날은 5월 18일이다- 을 맞아 전국적으로 채용 성차별 사례를 수집했다. 여성노동자회 전국 지부들이 조사한 채용 성차별을 모아 보니 그 유형도 다양했다. 면접 시 결남출을 묻는 것은 기본이었다. 면접에 응시한 여성들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결혼과 출산 계획을 면접 자리에서 답하느라 고통스러워했고 탈락이라는 결과를 받아들고 분노에 떨어야 했다.
지원에서 여성을 배제하기 위한 작업들도 진행되고 있었다. 물리치료사 등 특수직종들은 취준생들이 모인 카페가 있어 정보도 교환하고 취업 공고도 게시되곤 했다. 그런데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세상 점잖은 채용 공고가 떠서 여성들도 관심을 갖고 지원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취준생들이 모인 카페에서는 남성 우대라는 설명이 추가되어 게재되었다. 정작 채용정보를 올린 본인은 채용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지만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세밀한 정보들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채용정보들은 채용완료와 동시에 삭제되고 있었다.
기아자동차는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한 사실이 드러났다. 불법파견 판결로 하청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하는 기아자동차는 지금까지 1,500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기아차 비정규직 지회는 지난달 16일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년 간 일하던 라인에서 내보내거나 기존에 하지 않던 작업을 시켰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은 기아자동차의 성차별에 고용노동부 진정과 국가인권위 진정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성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52.4%에 육박한다. 여성노동자 두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인 현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반도체 제조 업체 구미 KEC 노동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사부터 남성보다 한 단계 낮은 직급으로 채용됐다고 주장한다. 30년 일한 여성노동자와 7년 일한 남성 노동자의 직급이 같은 경우도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이 회사에서 여성은 모두 낮은 직급에 몰려 있는데 반해 남성들은 높은 직급에 몰려있었다. KEC 노동조합 역시 회사를 성차별로 고용노동부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은 상태다.
유리천장은 채용부터 시작되어 여성의 전 생애를 관통하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매년 3월 8일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하여 각국의 유리천정 지수를 발표하는데 항상 우리나라는 가장 심각한 유리천정 지수를 나타내는 나라로 지목되고 있다. 채용 성차별은 체계적 차별의 시작점이었다.
우리는 채용 성차별에 강력 대응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채용성차별은 노동자로 진입 조차 하지 못한 취준생들을 겨냥하고 있어 더욱 악랄한 차별이다. 내가 성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주장하기도 어렵고, 동종업계로 계속 지원을 해야하는 취준생의 입장에서 이를 문제제기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채용성차별은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실체이다. 여성 취준생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남성이라는 성별 스펙을 이유로 차별당하고 있다. 채용부터 시작된 성차별은 기업규모로 양분되는 우리나라 이중노동시장 구조에서 여성들을 중소영세 사업장으로 내몰고 있었고, 정규직으로 가는 진입로를 차단하고 있다.
시작부터 성차별로 인해 뒤틀린 현실은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라는 이상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 그러나 이런 채용 성차별에 대한 벌칙은 벌금 500만 원이 고작이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고용노동부 차원의 대책을 만들지 않고 타 부처에 미루고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채용 성차별의 결과는 OECD 1위의 성별임금격차로 환원된다.
우리는 채용 성차별에 강력 대응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채용부터 시작되는 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 응답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지난 3월 발표된 정부의 청년 일자리 대책에서도 채용성차별 해소 등 젠더관점의 대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차별이 횡행하는 노동현장에서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반세기 전 임금평등법을 제정하고도 최근 더 강도 높은 법안을 마련한 '성평등 선진국' 아이슬란드의 소르스테이든 비글륀손 사회평등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사업장 내 성차별적 장벽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부숴버리고 싶습니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진보에는 강제성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역할은 차별을 명확한 범죄로 우리 사회에 정확하게 인식시키고 이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일상에 뿌리 박은 성차별을 걷어내는 데 행정력을 총동원하는 것이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당장 움직여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채용성차별은 여성들의 삶은 물론 우리 사회의 정의와 평등, 민주주의를 나락으로 끌어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