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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변곡점, 늘 여성이 있었다

역사의 변곡점, 늘 여성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0 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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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여성 대통령'에서 예정된 파국으로 

지난달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졌다. 국정원 특수활동비 불법수수 및 공천개입 관련 재판이 계속되겠지만, 작년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1년여 만에 비로소 한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숨죽인 침묵을 뚫고 터져 나온 환호는 국가의 오작동을 멈추고 스스로를 주권자로 위치시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런데 수천 자에 이르는 탄핵소추의결서와 탄핵결정문, 그리고 구형논고에 매번 적시되던 '헌법수호의 의지'는 정작 피고인 박근혜 당사자에게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최후 의견서에는 자신은 국가와 국민만 생각했을 뿐이라는 선언만 반복된다. 위임받은 권력으로서 대통령을, 애민정신 충만한 위정자로 이해하는 박근혜는 그렇기 때문에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산으로 처분된다. 그가 직선제 개헌 이후 차떼기로 상징되는 부정부패 등 기존 정치의 위기를 발판으로 삼아 첫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망각된다. 

무엇보다 박근혜는 동북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은 여성 이슈를 다른 당이 적극적으로 선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음이 이미 수차례 지적됐다. IMF 이후 경제성장 제일주의라는 신자유주의 정언 명령이 개발독재 정권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되살렸고, '여성' 박근혜는 이를 덜 노골적으로 보이게 하는 알리바이였다. 아버지처럼 경제를 살리겠지만, 독재를 하지는 않겠지 등이 그에게 표를 던진 이유였다. 돌이켜보건대 박근혜의 당선은 박정희 동상에 절하는 어버이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성이슈를 해일  앞의 조개나 공작쯤으로 치부한 채, 아파트 한 채로 앙상하게 남은 가부장 중심의 가족을 유지하려는 욕망들 때문이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의 왜곡된 변주 

실로 1987년 민주항쟁과 1997년 외환위기가 각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교차했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1997년, 1994년, 1988년 시간을 역진하며 인기리에 그려냈듯, 2000년대 직전의 시기는 그나마 좋았던 시기로 문화적으로 재현됐다. 기대할 수 없는 사회안전망을 천방지축 '개딸'들의 첫사랑 찾기라는 가족재생산 로맨스로 치환한 것이다. 

최근 여성 아이돌까지 읽었다는, 무시무시한 페미니스트 교본 <82년생 김지영>은 그 낭만화된 시대에 대해 여성 당사자가 각종 사건과 통계를 촘촘히 활용하여 정색하는 이야기이다. 지난 몇 년간 여성차별은 훨씬 교묘해졌고 여성혐오는 날로 기승을 부렸으며, 박근혜 정부의 양성평등 기조의 일·가정양립 정책은 허구임이 증명됐다. 연애, 결혼, 출산은 남성에겐 성취해야 할 정상성의 표지이지만, 여성에게는 비정상성을 촉발하는 원인인 것이다. 

물론 '82년생 김지영'씨의 낯선 얼굴에 '74년생 유시민'씨나 '79년생 정대현', '90년대 김지훈'씨까지 힘들다고 자못 진지하게 대거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김지영'씨의 내일을 신혼부부 주택 공급이나 국공립 어린이집 신청, 그리고 찾아가는 산후도우미 서비스로만 제시하려는 것이다. 이는 최근 논란이 된 서울시의 한 홍보물에 나타난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성별화된 각 세대의 얼굴이 등장하고 고정된 성역할에 따른 그 세대의 과제가 제시된다. 보육과 양육이 초저출산 시대에 중요한 사안이기는 하나, 그것이 여성 이슈의 전부인양 말해져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허리 계층과 생산가능 청년인구의 모델로는 정확히 남성이 제시되고 있다. 이 구도에서 가족을 경유하지 않는 단독자로서 여성 시민과 청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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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늘 여성이 있었다

강조컨대 여성 정치를 세습적 권력으로서의 여성 대통령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완성으로서 여성 유권자로 논의했다면 대통령 박근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정희-박근혜' 카르텔(Kartell)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절삭되고, 여전히 남성정치인은 자신이 스트롱맨(Strongman) 혹은 성군(聖君)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여기에 이화여대 시위를 비롯해 페미존(Femi-zone) 행진 등 여성들의 투쟁은 항쟁의 도화선이나 격발지로 강조되지 못하고, 하나의 에피소드로 삽입되기 일쑤다.
 
분명 82년생 김지영씨는 스무 살 대학 입학한 그해 주한미군 장갑차 압살사건의 희생자 여중생 미선과 효순을 애도하는 작은 불꽃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반대 집회 때 쏟아져 나온 '촛불소녀'에 질세라 각 커뮤니티의 깃발을 들고 도도히 등장했던 '배운녀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진짜 어디선가 살고 있을 김지영씨들도 2000년대 이후 헬조선의 낮과 밤을 고스란히 견뎌왔다. 2015년 봄, 흉흉한 메르스 정국에서 메갈리아 미러링에 포복절도하고, 2016년 봄,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포스트잇에 고개를 주억거렸으리라. 그리고 우리도 제 몫과 제 목소리를 가진 시민이자 청년이라고 함께 외쳤다. 2017년 봄,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하라는 시위행렬에 여성들도 있었다. '여성' 대통령을 지지하겠다는 여성뿐 아니라 여성 '대통령'을 비판해야 한다는 여성들이 모두 있었다. 

이제 박근혜 전 대통령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비운의 영애도, 마땅히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할 국가 행정부의 수반도 아닌 자연인 박근혜씨가 되었다. 그 역시 한 명의 시민으로 법률적 권리와 의무를 충실히 인정받고 실천하길 바란다. 마찬가지로 소설에선 차마 드러나지 않았던 김지영씨들의 정치적 의견을 더 많이, 더 크게 듣고 싶다.
 
민주주의의 완성은 단지 한 사람으로 구현되지 않고 언제나 지향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 과정에서 실질적 성 평등은 개헌 논의를 비롯해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더 높이는 방향으로, 강력하게 요구돼야 한다. 2018년 봄, 다시 몸이 욱신거리고 입이 달싹거리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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