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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 비웃음... 그녀는 단숨에 '국가의 적'이 됐다

금발, 비웃음... 그녀는 단숨에 '국가의 적'이 됐다

오마이뉴스 0 8,589

운동하는 여자 연재 기사 중 하나인 '헬스장의 레깅스, 너 보라고 입은 게 아닙니다' 편은 내가 지금껏 쓴 모든 글 중에서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글이 게시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남성 독자가 '기사를 똑바로 쓰라'는 항의 메일을 보내고, 여성 독자가 '악플에 상처받지 말라'는 응원 글을 보냈을 때 알았다. 그 글이 뭔가를 건드렸음을.

 

나는 그 글로 인해서 남부럽지 않은 악플 세례를 받았고 잠깐이나마 '온라인에서 미움받은 사람' 중 하나가 됐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착오가 있었다. 나는 미움받은 사람이 아니라 미움받은 '여자'였다. 남성 필자는 아무리 강건한 어조로 페미니즘을 다뤄도 편집국이 항의를 받을지언정 필자 개인이 공격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받은 항의는 하나 같이 정당한 비판이라기보다 공격과 위협에 가까웠다. 아무런 논리도 없이 '너의 이름을 기억해놨다'는  내용의 메일을 3일에 걸쳐 매일 한 통씩 보내는 의도가 위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청부 폭행' 휘말린 피겨여왕, 미국은 그녀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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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연재분에서 스포츠계의 여성 영웅을 다루었으니(관련 기사 : '라면'과 '헝그리 정신'이 임춘애와 김연아 만들었다고?) 이번에는 역사상 가장 미움받은 여성 선수들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한다. 내가 몇 시간 미움을 받는 데서 그쳤다면 여기, 이 여성들은 전 국가적으로 열렬하고도 집요하게, 아마도 평생 동안 미움받을 것이다. 그 주인공은 너무나 미국적인 인물로 미국 그 자체라고 평가받으며, 미국에 의해 사랑받고 미국에 의해 버려진 피겨 스케이터 토냐 하딩이다.

 

1994년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서 오직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 스포츠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해 1월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이라는 이름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의 이름 뒤에 청부 폭행과  FBI 수사라는 단어들이 따라붙었는데 피겨 스케이팅을 가장 아름다운 종목이라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피겨와 청부 폭행이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당시 언론은 이 자극적이고 호기심을 자아내기 좋은 사건을 앞다투어 파헤쳤는데 최종적으로 이 사건은 '라이벌에게 앙심을 품고 폭행을 사주한 악녀 토냐 하딩, 피겨계에서 영구 제명되다'로 종결됐다.

 

그로부터 20년이 더 흐른 2017년, 토냐 하딩의 생애와 그 유명한 스캔들은 영화화된다. 영화 <아이, 토냐>는 엄마의 학대와 남편의 폭력에 길들여져 잘못을 저지르고도 남을 탓하거나 회피할 줄밖에 모르는, 토냐 하딩의 유아적인 인격을 조명한다. 그와 함께 미국의 위선도 폭로한다.

 

미국 스포츠계는 토냐 하딩을 '피겨 하는 악녀'로 소비하며, FBI 수사까지 받은 그를 무혐의로 풀어준 다음 낸시 캐리건과의 라이벌전에 서게 한다. 올림픽 무대를 악녀와 불쌍한 피해자 간의 빅매치로 홍보하며 흥행에 이용한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청부 폭행 사건 이전에도 토냐 하딩은 피겨계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는 미국이 추구하는 여성상이나 심사위원들의 보수적인 심사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오직 실력 하나만 출중했던 선수였다. 이렇게 대중의 미움을 받을 조건을 두루 갖춘 여성 선수는 추락하는 과정까지도 가십으로 소비됐고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악녀로 낙인찍힌 채 살고 있다.

 

이쯤에서 분명히 밝혀두지만 나는 토냐 하딩의 죄를 두둔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다만 나는 기억한다. 아내를 무참하게 살해했던 미식 축구 선수 오제이 심슨과 성폭력과 폭력을 일삼았던 권투 선수 마이크 타이슨, 지금까지도 폭행으로 꾸준하게 구설수에 오르는 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맨, 폭행과 약물로 수도 없는 스캔들을 생산한 축구 선수 마라도나가 연일 스포츠 뉴스를 장식했던 것을.

 

이들은 일반인, 그중에서도 주로 여성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살인까지도 저질렀다. 물론 이들도 죗값을 치르고 명예가 실추되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은 선수가 아닌 악인으로 박제되거나 집요하게 미움을 받지는 않았다.

 

메달·포상금 박탈 청원까지... 비현실적이었던 비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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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한국 스포츠계 사상 가장 극렬하게 미움받은 여성 선수도 빙상 스포츠 종목에서 탄생했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을 뜨겁게 달군 김보름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2월 19일 여자 팀추월 준준결승이 치러지던 있던 날, 들끓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날의 분위기를 잊을 수 없다.

 

팀추월이라는 종목조차도 생소했던 나는 모든 일이 일어난 다음에야 사건의 경위를 알게 됐다. 그러는 동안 김보름 선수의 유명세와 비난의 강도가 동시에 수직 상승하던 것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김보름, 박지우 선수의 자격 박탈과 빙상연맹 엄중 처벌'에 관한 국민청원이 시작된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6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원에 동의했다.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팀추월 사건과 빙상 연맹의 파벌 문제를 파헤친 것이 4월. 이제야 빙상 연맹의 마피아라 불리던 전명규 라인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이는 김보름 선수가 전면에 서서 온 국민의 들끓는 분노와 비난을 한 달이 넘도록 받아내며 갖은 고초를 치른 다음에야 이뤄진 일이다. 연맹의 고질적인 병폐로 인해서 벌어진 일로 인해서 선수 개인이 과도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욕당한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보름 선수를 후원하던 의류 브랜드는 즉각 '계약 연장 계획이 없다'고 밝혔고 2월 24일, 그는 매스스타트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고도 죄송하다며 엎드려 울어야 했다. 이후에도 한번 악녀로 낙인찍힌 선수에 대한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김보름 선수의 은메달을 박탈해달라', '김보름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이 다시 등장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김보름 선수는 그 사건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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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지난 2월을 다시 떠올려 보면 이 사건과 관련해서 대중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은 것은 김보름 선수의 인터뷰 장면이다. 실망스러운 경기를 노선영 선수의 부진 탓으로 돌리는 듯한 그의 발언은 노 선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비겁한 의도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해당 발언에 탈색한 금발과 조금은 불량스럽게 비웃는 듯한 표정이 보태져, 인성 논란이라는 심판대가 세워졌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김보름에게서 토냐 하딩과의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실력이 뛰어나지만 성실하게 운동만 하는 선수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고 대중의 미움을 사기에 좋은 이미지에 더 가깝다.

 

끝으로 이 사건과는 별개로 언론에 알려지기도 했으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한다. 올림픽 최초로 성폭력 상담센터를 운영했던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끝날 때까지 성폭력 센터에 접수된 사건은 총 36건이었다.

 

또 전현직 국가대표 수영선수들이 체고와 선수촌의 여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 여성 선수들을 불법 촬영을 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문제 삼거나 가해자들을 엄벌해달라고 청원은 한 건도 없었고 심지어 우리는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떤 유명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의 경중과 상관없이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가혹하게 비난받으며 가십으로 소비되는 현상은 스포츠계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스포츠계야말로 이러한 일이 더 빈번하게, 극명하게 일어나는 분야다. 

 

"미국은 사랑할 사람을 필요로 해. 그리고 미워할 사람도 필요로 하지."

 

영화 <아이, 토냐>의 명대사가 스포츠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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