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감독 = 실패"? 여성 영화계의 '넷플릭스' 만든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을 떠올려보자. <군함도>의 말년과 소희, <택시운전사>의 은정과 상구 엄마, <박열>의 가네다 후미코... 한국 영화에는 어떤 여성이 얼마나 등장하고,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2016년 100만 관객 이상의 한국영화는 총 24편이었다. 그중 영화의 성평등 지표로 활용되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6편에 불과하다. 벡델 테스트 기준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다. ▲ 이름을 가진 여성이 최소 2명 등장해서 ▲ 서로 대화를 나누고 ▲ 그 대화의 주제가 남성에 관한 것이 아닌 영화면 된다. 이조차 통과하지 못한 영화가 수두룩하다는 것은 한국영화판이 지나치게 남성 위주로 돌아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영화 밖에도 여성 영화인이 설 곳은 좁다. 2015년 전체 개봉작 중 여성 감독이 차지하는 비율은 5.2%였다. 또 최근엔 유명 영화감독이 여자 배우를 폭행했다는 증언이 나와 논란이 일었다. 현재 이 감독 이름을 딴 사건 공동대책위까지 나온 상태다. 한 영화에 출연했던 개그우먼은 본인 동의 없이 노출신을 배포했다며 감독을 고소했다. 심지어 강남역 살인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홍보하는 '스릴러' 영화까지 등장했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영화판은 여전히 여성의 관점과 존재 자체가 지워진 '기울어진 운동장'인 듯하다.
남성 중심적 영화판을 거부하고 "I am ready to pay for feminist films(나는 여성영화에 돈 쓸 준비가 됐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영화계 성평등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업 <퍼플레이>다. 지난달 29일, 여성영화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는 <퍼플레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에는 일지, 보영, 미현, 지영, 나신씨가 함께했다.
'이래서 여성 감독은 안 된다'고?
- 영화계 성평등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있는지.
일지: "4년 정도 퀴어영화제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성영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어졌고, 다른 친구들도 공감을 많이 했다. 영화계 성차별이라는 게 내적인 문제도 있고 외적인 문제도 있다. 내부적으로는 일단 영화 쪽이 위계질서가 엄청나다. 과격하고 폭력적인 현장 분위기도 있고, 여성 영화인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활동하고 싶어도 대개 말을 못 한다. 게다가 외적인 건 또 다른 문제다. 여성 감독은 흥행에 실패한다는 편견 때문에 투자가 잘 안 되고, 또 여성이 감독이면 스태프들이 좀 더 쉽게 보고 소통이 어려운 문제도 있다.
이 내적·외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니까 영화판에서 여성의 성평등을 이룬다는 게 정말 쉽지 않다. 특히 영화산업이 굉장히 상업적인 영역이지 않나. 굉장히 적은 여성 감독들이 굉장히 적은 여성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그게 상업적으로 완전히 성공해야지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거다.
남성 감독들도 수많은 영화 중에 소수만이 성공하는데, 여성 감독들은 소수의 영화에서 한 번만 실패해도 '이래서 여성 감독은 안 된다'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런 문제를 우리가 계속 환기하고, 관객들도 계속 나는 여성영화를 원한다고 이야기해야 하고, 정부나 지자체도 다양성을 위한 정책을 펴야 하고, 투자자들도 바뀌어야 하고, 영화 산업 전반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 퍼플레이에서는 매달 여성영화 상영회를 열고 있다.
보영: "마침 오늘(7월 29일)이 '퍼플데이'였다. 홍대에서 <할머니 배구단>이란 영화 상영회를 하고 왔다. 2013년에 만든 노르웨이 다큐멘터리인데, 60대에서 90대에 이르는 할머니들이 몇십 년간 같이 배구를 해오면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이야기다. 98세 할머니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된다고 배려해주고, 다들 낙천적이고 여유롭다.
영화를 보고 '나이 듦'에 대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상영회를 기획할 때) 보통 이렇게 주제를 잡고 재밌어 보이는 영화를 고른다. 5월은 가정의 달 기념으로 여성과 가족을 다뤘고, 6월에는 다이어트의 시즌을 맞아서 여성의 몸을 주제로 했다. 7월은 마침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주최하는 '여성인권영화제 찾아가는 이동상영회'가 있어서 함께 진행하게 됐고, 덕분에 할머니배구단이라는 좋은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나신: "영화 상영이 끝나면 수다회를 하는데, 그때 관객들이랑 자기 경험을 나누는 게 참 좋다. 서로 이야기 나누고 위로하고 공감하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도 큰 힘을 얻었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뭔가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현: "수다회를 하다 보면, 평소에 '나만 느꼈나?' 했던 것들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뭔가 연대하는 느낌도 강하게 들고. 우리가 실제로 공동체가 됐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일지: "이번 달에 처음 장편을 세운 거고, 사실 그전에는 단편 상영회를 많이 했다. 단편 여성영화들 같은 경우에는 영화제가 끝나면 볼 창구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있는지도 모르게 돼버리고... 2000년대 초반 영화들만 해도 이제 아무도 못 보는 숨겨진 영화처럼 된 게 많다. 그걸 우리가 발굴해서 더 많은 관객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 9월에 여성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퍼플레이' 어플 출시를 앞두고 있다. 'IPTV에서 찾을 수 없던 영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영화'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기대가 크다.
일지: "지금 어플 기획과 디자인은 다 끝났고 ios·안드로이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거기에 맞춰서 영화수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람들한테 '여성영화가 이런 결이 있고 이런 장르가 있구나, 독립영화·상업영화부터 다큐·극영화·애니메이션까지 참 많고 재밌구나'라는 걸 느끼게 하고 싶다.
정말, 한 편 한 편 찾아다니며 구하는 중이다. 해외영화는 영화제에 연락한다던가 배급사가 있으면 배급사에 연락하고, 없으면 감독한테 직접 연락하기도 한다. 일이 정말 많다.(웃음) 단편 영화들은 번역도 직접 하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준비해서 앱 오픈 시 여성영화 300편 공개를 목표로 하고 있다."
- 출시 이후에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보영: "더 많은 사람이 퍼플레이에서 쉽게 다양한 여성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좀 더 큰 꿈을 꾸자면, 여성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분들의 수익에도 기여하고 싶다. 경력이 얼마나 됐든 학생이든, 여성 감독들이 '여기서 내 영화를 보는구나!' 하는 힘도 얻길 바라고, 감독님들의 팬층도 생겼으면 좋겠고. 사실 그런 게 다 창작자한테 엄청 큰 힘이지 않나. 그런 게 계속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니까."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
- 퍼플레이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인가
일지: "퍼플레이 소개 문구로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 '탄탄한 구성 끝에 해피엔딩'이라는 말을 쓴다. 영화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현실이 영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 않나. 영화를 통해 다양한 여성상이나 평등의 가치가 확산되기를 바라는 믿음이 있고, 이 좋은 영화들을 통해서 우리가 일과 삶과 꿈이 일치되는 행복한 일터를 만들고 싶다. 결과적으론 '탄탄한 구성 끝에 해피엔딩'이 오길 바란다. 우리뿐 아니라 여성 감독이나 여성 제작자가 더 많은 관객들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하자, 이런 의미도 있다."
- 영화판의 성평등이 현실의 성평등에도 기여한다고 믿는 건가?
일지: "서로 유기적인 거 같다. 영화에서도 그런 얘기가 많이 나와야 하고, 현실에서도 이뤄져야 영화에도 또 반영된다. 옛날에 드라마 <대장금>이 해외에서 엄청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대장금> 해외 열풍에 관한 다큐가 만들어졌는데, 거기서 되게 많은 어린 소녀들이 대장금을 보고 '나도 장금이처럼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희망을 얻는다. 이걸 보면서 문화콘텐츠가 실제 삶에 파급력이 있을 수도 있구나, 어떤 계기나 동기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보영: "<와즈다>라는 영화도 있잖나. 영화 덕분에 실제로 사우디에서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게 됐다. 영화가 현실에 무조건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지만, 영화 속 세계관에 빠져들고 공감하고 그러다 보면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한편으로 현실이 영화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영화 <암살> 같은 경우에, 사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는 계속 있었는데, 그 긴 시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등장하지 않다가 그때 딱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던 건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런 영화 캐릭터를 받아들일 시대가 왔구나,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도 그렇고 여성들이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 목소리를 내면 반영이 되겠지, 반영되면 또 현실에도 반영이 되겠지, 이렇게.(웃음)"
언제나 가까운 여성 영화를 꿈꾼다
- 여러분들의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궁금하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든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
보영: "어릴 적부터 민감한 어린이였다.(웃음) 또래 애들이 겪을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 촉수가 발달한 것 같다. 그래서 항상 남자애들이랑 경쟁하고 이기고 싶어 하고. 그러다 대학생 때 페미니즘 이론을 접했고 세미나도 하고 수업도 듣고 활동도 하면서, 치유받는 느낌을 받았다.
여자들끼리 차별에 관한 경험을 나누면 정말 할 말이 너무 많지 않나. 서로 자기 얘기도 많이 하고 많이 듣고. 이런 과정들이 참 좋았다. '나는 이제 페미니스트로 살겠다'는 순간이 특정하게 있었다기보단, 어릴 때부터 내가 느낀 불편함의 배경을 잘 설명해준 이론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미현: "페미니즘을 접한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 페미니스트 아니다'고 말하고 다닌 때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일을 시작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면 살았던 것 같다. 문제가 있어도 내가 그걸 지적하고 바꾸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 친구가 여성주의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해줬고, 그러다 스터디도 하게 됐다. 불과 2~3년 내외로 그런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고, 불합리한 세상을 인식하게 됐다."
일지: "최근에 페미니스트 모먼트였던 순간이 있다. 영화제 관계자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그분이 전화를 끊으면서 '여성영화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서로 쉽게 도움 청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뭔가 만족감과 소속감이 들었고…. 그런 연대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 앞으로 찾아올 새로운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있다면? 혹은 어떤 모먼트였으면 좋겠나?
일지: "퍼플레이의 성공? (웃음) 온라인에서는 퍼플레이 앱을 통해 다양한 감독들을 만나고, 오프라인으로는 페미니스트 페스티벌 같은 걸 열어서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공연·전시를 아우르는 문화의 장을 만들어보고 싶다. 서로에게 지지와 힘을 공유하고 영감을 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보영: "딱 질문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없었으면 좋겠다. 보통 그런 순간은 한 사람이 크게 희생하는 순간이지 않나. 지금의 페미니즘 물결도 나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 어떤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들이 더 없었으면 좋겠다. 이미 문제는 충분하니까, 이 문제에서 더 불거져서 누가 희생당하거나 그래서 '아 모먼트다' 자각하는 것보다는, 지금 있는 문제들을 더 예민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확장되면 좋겠다."
-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무엇을 '아는 페미'인가?
일지: "'나를' 아는 페미. 내가 나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고 나부터, 내 주변부터 조금씩 바꿔나가면 되지 않을까? 나를 돌아볼 때 반성하거나 만족하는 순간들이 쌓이면 페미가 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이 어렵다거나, 특정 누군가만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보영: "'아직 멀었다는 걸' 아는 페미. 요즘은 겉보기에 괜찮은 세상처럼 여겨진다. 여자도 경제활동을 하고, 드라마에 레즈비언·게이도 나오니까... 하지만 여성이 경제활동을 해도 헤드 위치에 올라가지 못한다던가 출산하면 경력이 단절된다던가, TV에 성소수자가 나와도 그들이 제도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던가 이런 성차별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과거에 비해서는 보기에 더 나으니까 자꾸 페미니스트들한테 예민하다고 한다. 비교 기준을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 진짜 성평등한 세상을 기준으로 둬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아직 멀었다."
미현: "'뭣이 중한지' 아는 페미. 예전에는 내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책도 읽으면서 생각이 변했다. 그게 얼마나 중하고, 내 삶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알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도 얼마만큼 중한지 느끼고 함께 하면 세상도 많이 바뀌지 않을까, 싶다."
나신: "'나답게 사는 방법을' 아는 페미다. 사회에서 정한 선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정말 나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