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왜 안해" 엄마와 딸의 옥신각신 비혼 협상
나는 10대 때 학생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과 종종 '우리 중 누가 가장 먼저 결혼할 것 같냐'라는 질문으로 수다를 떨곤 했다. 그때 "난 결혼 안 할 거야"라며 선수를 친 선구자(?)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친구를 놀렸다.
"이렇게 말하는 애들이 꼭 제일 먼저 간다더라"
"결혼할 사람 생기고 얘기하자~?"
그 당시에는 그 친구에게 왜 비혼을 결심했는지 물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 결정이 이해가 간다.
내 나이 26살, 이제는 동갑인 여자친구들의 결혼식에 가는 일도 종종 생긴다. 나의 여고 친구들 중에는 결혼해서 어여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친구들이 꽤나 된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그녀들의 소식을 보고 있으면 아이가 너무 예쁘고 행복해 보여서 부럽기도 하다. 친구의 딸을 마치 내 딸인 것처럼 사랑스럽게 들여다보고 다른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아는 언니의 신혼집에 집들이를 다녀왔다. 작지만 깔끔한 신혼집에 걸린 분위기있는 웨딩사진과 두 짝으로 맞춰져 있는 올망졸망한 가구들을 보면서 '이 언니가 정말 결혼했구나' 실감이 났다. 집들이라고 맛있게 차려준 음식들을 먹으며, 확실히 이렇게 살면 마음의 안정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저 삶을 산다고 해서 똑같이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대학을 졸업하고 유부녀가 된 친구들의 행복한 사진 뒤에 어떤 어려움들이 있을까 상상해보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남편보다 월급이 적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는 선택을 내리면서 한숨을 쉬는 모습, 온종일 아이를 보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모습, 매일매일 집안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좋아하는 티브이프로그램 한 편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모습.
명절에 어색한 시어머님과 함께 쪼그려 앉아 전을 부치는 모습,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의 밥상을 차려주는 것부터 자기 직전까지 긴장해 있는 모습, 좋아하는 영화 구경도 몇 달 동안 못하며 영화 포스터를 보고 군침만 삼키는 모습, 어쩌다 아이를 데리고 집 밖에 나가서 카페라도 갈라치면 '노키즈존'이니 '맘충'이니 자신을 거부하는 세상을 마주한 모습.
사실 이런 생각을 하면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안정된 삶에 대한 부러움은 싹 날아간다. 직접 말은 못 하지만 이런 성차별적인 세상에서 엄마로 살아가길 택한 친구들의 삶이 정말 괜찮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걱정이 남는 경우가 많다.
엄마, 그런 결혼이라면 전 거절하겠습니다
난 몇 년 전부터 비혼을 결심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부부인 엄마와 아빠를 보고 나서다.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부모님을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도 차차 식는데 왜 꼭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실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도 없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내 마음과는 반대로 갈 때도 있을 것이고, 도저히 내 뜻을 따라주지 않는 자녀를 보녀서 '괜히 낳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왜 굳이 돈 몇억씩을 들여서 아이와 나 모두 행복하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 집은 엄마가 직장을 다니며 가사일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낳고도 직장을 계속 다녔다. 그동안 육아는 아빠가 담당했다. 아빠가 결혼 초기부터 직장을 잃고 IMF외환위기가 닥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가끔 엄마네 집에 갈 때면 나보다 일찍 일어나 밥을 해 주시고 퇴근 후에는 틈틈이 집을 치우고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을 하는 우리 엄마가 진정한 슈퍼우먼인 것 같다.
사실 엄마를 보면서 여성의 경제권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독립적인 여성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아마 비혼에도 엄마의 삶이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나의 비혼 결정을 거부하고 있다.
몇 년에 걸쳐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분명히 말했는데도 좀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나의 결혼을 전제로 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엄마 : "나중에 우리 딸 결혼하면~ (생략)"
나 : "결혼 안 할 거라니까요~"
엄마 : "결혼을 왜 안 해! (버럭)"
엄마는 나름대로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모순에 빠진다.
엄마 :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서른한 살 쯤에 결혼해"
나 : "(한숨)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어떻게 서른한 살에 결혼해요! 모순이잖아~ 5년밖에 안 남았어요..."
엄마 : "결혼하고도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
엄마 직장 동료들의 주된 이야기 주제는 각자의 자녀들이 얼마나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나 돈 잘 벌고 안정된 직업을 얻었는지, 얼마나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는지 같다. 이미 나에게 좋은 직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엄마는 아직 주변 사람들에게 내 비혼결 심까지는 쉽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엄마 : "회사에서 딸래미 결혼 안 하냐고 물어보길래 '때 되면 자기가 알아서 할 거예요~' 했지"
나 : ...
엄마 : "(결혼상대로) 6살 연하까지는 봐줄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기도 한다.
나 : "나는 지금 우리 가족도 잘 못 챙기는데 남의 가족 챙기고 싶지 않아요"
엄마 : "그건 그렇지. 그럼 연애도 안 하게?"
나 : "아니~ 연애는 할 거예요"
내가 비혼이라고 해서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랑의 힘을 믿는다.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삶에 의욕이 생기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 생기리라는 것도 믿는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꼭 결혼을 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엄마도 분열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 넌 결혼 하지마. 엄마랑 여행이나 다니자"
"결혼 안 한다며? 엄마랑 산다며?"
엄마는 딸이 남들과 너무 다른 길을 가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딸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자꾸 충돌하나 보다.
엄마 : "네 사주에 37세가 되면 널 빛내주는 남자랑 결혼한다고 했어"
엄마는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내가 어느 정도 운명론을 믿기는 하지만, 저런 운명은 거부하고 싶다.
어떻게든 결혼 시키려는 그 속셈, 다 보입니다
요즘은 비혼을 선택하는 영페미니스트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비혼 결심은 고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친구들 사이에선 이상한 선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결혼으로 만들어진 가족과 친척들은 나의 비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남성들은 결혼하면 직장에서도 점수를 후하게 딴다. 하지만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에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출산과 가사일을 도맡을 거라는 가정 하에 승진에서도 배제된다. 여성은 결혼을 하기 전에만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결혼을 너무 늦게 안 해도 문제가 된다.
최근 '#영포티'가 논란이다. 젊은 감성을 지닌 40대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란다. SNS에서 영포티가 불붙게 된 데엔 이유가 있다.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의 러브스토리를 담은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어리고 예쁜 여성을 나이 많고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중년 남성과 연결시키는 건 어떻게든 여성을 깎아내려 결혼하게 만들려는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회가 이러니, 내가 이 뻣뻣한 고개를 쳐들고 버티지 않을 수가 있느냔 말이다.
하지만 나도 이런 사회가 아니었으면 비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결혼을 하고도 육아나 가사에 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면, 직장에서 내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승진에서 차별을 받거나 집에 빨리 들어가라며 눈치를 주지 않는다면 나의 선택은 아마 달라질지도 모른다.
또, 여성과 남성의 혼인뿐 아니라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을 비롯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의 결혼이 제도적,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은 오히려 결혼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은 훨씬 더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결혼과 비혼은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행복할 수가 있다. 나의 비혼은 선택한 것은 제대로 책임지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이다. 나의 선택이 세상물정 모르는 고집쎈 어린 여자애의 치기로 여겨지지 않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