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같지 않은데?" 이토록 야만적인 말
"감수성 예민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성적 피해를 입게 되었는 바, 이로 인한 피해자들의 성적 모멸감과 수치심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와 정신적 고통으로 남게 되고 향후 올바른 성적 가치관과 자기 존중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점"
위 문장은 지난 2012년 서울중앙지방법원 청소년 대상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법원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강조했다. 한편, 필자가 지원했던 사건 중에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입은 그 다음날 정상적으로 가게를 운영하고 일했던 경우가 있다. 당시 가해자 측 변호인은 이를 들어 "성폭력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는 '피해자가 일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여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회복 불가능'하거나 '치유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져왔다. 이런 관점은 언론이 아동을 향한 성폭력 범죄를 다룰 때 죽음이나 치명적 외상을 중심으로 보도하면서 더 강화됐다.
물론 이런 식의 접근을 통해 아동 성폭력 범죄의 심각성이 전 사회적으로 알려졌고, 그 결과 친고죄 폐지, 성폭력 피해자 국선변호사 제도 등 법·제도적 시스템의 보완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와 함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 또한 공고해진 것이 사실이다.
언론뿐만 아니라 반성폭력 운동 주체들 또한 성폭력 피해자가 받은 치명적인 상처를 강조해왔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상담 지원 활동가인 필자 또한 활동 초기 가해자의 강력한 처벌을 이끌어 내기 위해, 법원에 제출하는 상담소 의견서에 피해자가 현재 어떤 피해를 입고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회복에 진정한 도움이 되는가 '하는 반문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왜 다른 폭력과 달리 '성'폭력 피해에 대해선 꼭 '회복할 수 없다'는 식으로 심각성을 주장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는 말의 감옥
'학생은 이래야 한다' 혹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말은 사회적 잣대에 맞지 않는 이들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밀어내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예를 들어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자식 잃은 엄마가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가 있어?'라는 비난이 두려워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웃지도 못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유가족다움'이라는 잣대가 그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작동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성폭력 피해자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존재'라고 규정짓고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입은 피해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녀는 '그래야 하는 존재'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긴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한다. 피해 회복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지는 것이다.
경찰이나 검찰, 법정 혹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피해자가 우울하고, 슬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당당하고 논리적으로 자신의 피해에 대해 증언하는 이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을 것이다.
"당신은 성폭력 피해자가 맞나요?"
그뿐일까. 은연중에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를 주입받은 여성이나 아동들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회가 성폭력 피해는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먹을 범죄'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삶을 위축시킨다. 그리고 두려움의 감정이 생겨난 그 스스로 활동범위를 제한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은 대다수의 여성은(실제로 성폭력 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인 현실) '사회'라고 말하고 '남성'이라고 써야하는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보호'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2015년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라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실제 성폭력 피해자들을 대상(2005.1~2006.12.31 상담일지 389건/2014년 1~8월 30명 심층면접/2014년11~12월 235명의 설문조사)으로 한 연구 결과를 공개하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을 비판했다.
특히 '2차 피해적인 요소'라고 규정짓는 것들을 많이 경험할수록 성폭력 트라우마도 높아진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고, '성폭력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우며, 극복하기 힘들다'고 낙인찍는 이들이 많을수록 트라우마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어느 시기에 폭력이 일어났는지' 혹은 '도움을 요청했는지'가 아니라, '부정적 낙인'이 성폭력 트라우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이는 2차 피해가 성폭력 피해를 구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다.
"강간당한 것을 TV에 나와서까지 이야기하고... 아이고, 그 여자 이제 시집은 다 갔네."
최근 한 방송사를 통해 피해자가 성폭력 증언에 나서자, 바로 다음 날 필자의 동료가 헬스장에서 들은 이야기다.
"아니, 무슨 성폭력 피해를 입었는데 몸도 안 씻고, 속옷도 그대로 가지고 경찰서를 찾아갔대. 그렇게 잘 준비한 거 보면 그거 꽃뱀 아니었을까?"
성폭력 이후 피해자가 침착하게 대처한 어느 사건을 두고 주변인들이 던진 말이다.
"OOO님이 증인으로 법정에 서면 판사는 OOO님의 표정 하나하나를 다 볼 거예요. 그러니까 증언하다가 울고 싶으면 울어요."
이건, 부끄럽게도 피해자가 판사 앞에서 감정적으로 호소하길 바랐던 필자가 한 말이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성폭력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하고, 수치스러워해야 하며, 당황스러워해야 하고, 울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 안에서 필자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물어야 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는 이후에 그 사실을 당당히 주변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웃고, 밥을 먹고 이전처럼 일상을 살아가는데, 왜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자의 위치에서 한 치도 나가지 못한 채 피해자로써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지.
미투 운동(#MeToo)이 활발해지고, 우리는 매일 존재 자체가 가려졌던 성폭력 피해자들을 마주하고 있다. 그녀들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듣고 있다. 지금까지 존재했으나 숨어있기를 강요당했던 이들을 우리는 2018년에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 한달 반여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벌써 '지겹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왜 세월호가 가라 앉았는지 그리고 왜 304명의 희생자가 나왔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지금, 유가족에게 '왜 아직도 세월호 이야길 하냐'고 묻는 건 야만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를 걸고 나와 이제 겨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피해자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거나, 의심하거나, 혹은 왜 피해자답게 굴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도 야만이다.
우리는 적어도 "들을 수 없는 고통의 소리를 듣는 짐승의 귀와 그 고통에 말을 건넬 수 있는 인간의 입을 가진 인간의 시간"(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중)으로 되돌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