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될 것을 요구받아온 시간을 떠올립니다
오마이뉴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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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8 08:20
소녀, 소녀를 말하다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을 것을, 폭력을 사랑으로 믿으며 자랄 것을, 다이어트와 화장 등 온갖 방법을 불사하고서라도 섹시한 몸이 될 것을, 그러나 동시에 그 누구보다 순결할 것을……. 그리하여 '소녀'가 될 것을 요구받아온 시간을 떠올립니다. 세상이 붙여준 나의 이름은 언제나 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 양지혜, <걸페미니즘> 中
지난 2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에서 참여한 <걸페미니즘>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여성으로 길러지고 청소년으로 살아온 이들의 증언은 억압과 차별을 경험해온 여성 청소년에게 위로와 지지가 되었다. 나 역시 <걸페미니즘>을 쓰며, 내가 소녀로 살아온 시간을 긍정할 수 있었다.
나는 입시경쟁에 반대하며 대학을 거부하고, '여자 되기'를 거부하며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여성 청소년이었다. 졸업 이후에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을 2년째 운영 중이며, 앞으로 진행될 '소녀, 소녀를 말하다' 프로젝트의 기자단장을 맡고 있다.
'소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누군가는 '단발머리 곱게 빗은 그 소녀'라는 조용필의 노래 한 구절처럼 단정하고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남성에 의해 보호받는 연약하고 순진무구한 여고생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한편, 포르노그래피에서 소녀는 '처녀성'으로 묘사된다. 대놓고 드러나는 성이기보다는 '은꼴사'로 소비된다. 소녀는 한 번도 성을 경험해본 적 없는, 그래서 남성에 의해 '함락'되거나 '구원'받는 존재다.
그러나 소녀인 나는 학교에서 보호받기는커녕, 일상적인 폭력을 경험해야 했다. 9월에만 30곳의 학교에서 '스쿨미투'가 이어졌다. "엉덩이가 커지면 안 예뻐", "너희가 기쁨조", "너희는 아이를 다섯 명씩 낳아야 한다" 등 그간 학교에서 묵인되었던 성폭력이 고발되었다. 수십 년에 걸쳐 쌓이다 못해 곪았던 학교 내의 강간문화에 대한 고발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증언을 보며 나도 함께 울었다. '신고할 테면 신고해 보라'며 학생에 대한 체벌을 자행하고,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교감실로 끌려갔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학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져도, 칠판에 쓰인 영어 단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학교였다. 그런 학교 속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를 선언하고, 입시경쟁을 거부했던 시간이 있었다.
집에서 나는 사랑받는 딸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 싸우는 사람이었다. 부모와 친척들은 역시 딸이 애교가 많다며 나의 의사 표현을 '귀여운 반항'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된다", "청소년은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사회에서 소녀는 동등한 인격일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인형'이 될 것을 요구했고, 나는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싸우기를 반복했다.
또한 나는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주체였다. 나는 열한 살 때 처음 자위를 했다. 자위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은 죄책감이었다. 정해진 '소녀'라는 틀에서 나는 나의 성을 충분히 욕망할 수 없었다. 반면, 남성중심사회는 너무도 쉽게 나의 몸을 대상화하고 욕망했다. 나에게 2차 성징은 사회가 요구하는 '소녀의 몸'이 되는 일이었다. 또한 '소녀의 몸'이 되지 못한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소녀의 몸은 피부가 희어야 했고, 털이 없어야 했고, 가슴과 엉덩이가 크면서도 허리는 잘록해야 했고, 아동복만큼 작은 교복을 거뜬하게 소화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몸을 외면하게 되었고, 내가 가진 삶의 진실을 감추게 되었다.
나는 그간 미디어에서 소비되어온 소녀가 아니라, 이 땅에 발 딛고 직접 살아가는 소녀의 삶을 취재해보기로 했다. 스쿨미투, 탈코르셋 등 소녀들이 직접 겪고 있는 삶의 문제를 취재해보고자 했다. 누군가의 욕망으로 존재하는 소녀가 아니라, 스스로 욕망하는 소녀를 만나보기로 했다. 여성 청소년이 경험하는 삶의 문제를 여성 청소년의 입으로 말해보고자 했다. 청소년 페미니즘 기자단 '소녀, 소녀를 말하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너무도 다양한 0X년생 '소녀' 이야기
청소년 페미니즘 기자단 모집을 시작했다. 무작정 학교를 찾아가 포스터를 붙이고, SNS 계정에 청소년 페미니즘 동아리를 모두 찾아 일일이 제안서를 보냈다.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한 기자단 모집이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각자의 공간에서 고군분투하던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기자단의 문을 두드렸다. 저마다 다양한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상실감이 커요. 나는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욕을 먹어야 하는 건가 싶고. 그냥 내가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편할 텐데 싶고. 내가 이런다고 누가 알아주고, 관심 가져 줄까 싶고. 애들이 무섭더라구요.'
- 청소년 페미니즘 기자단 '소녀, 소녀를 말하다' 지원자 인터뷰 中
참가자 A는 학교에서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내는 일은 '우리에 갇힌 동물이 되는 일' 같다고 이야기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친밀하던 남자아이들에게 뒷담화를 듣고, 조롱과 멸시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언어폭력은 물론, 신체적 폭력을 암시하는 위협까지 오갔다고 했다.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성차별이 이루어지지만, 여성 청소년은 성폭력 피해를 발화하지 못한다. 여성 청소년의 피해는 '남자 아이들이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 '네가 너무 성숙해서 그래'라는 식으로 축소되고 은폐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을 공부할수록 자신의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참가자들이 많았다. 폭력에 저항할 언어를 찾을 수 있었고, 여성 청소년도 남성 성인과 동등한 인격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부당함과 혐오에 저항할 수 있었다.
'온갖 성차별 발언과 혐오발언이 난무하던 반에서, 그 누구도 불편하다고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반에서, 제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에는 반 이상의 친구들이 페미니즘 동아리에 가입했고, 저와 함께 목소리를 내주었습니다.'
- 청소년 페미니즘 기자단 '소녀, 소녀를 말하다' 지원자 인터뷰 中
참가자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참가자 B는 한 선배가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어 함께했고, 지금은 반의 절반 이상이 페미니즘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 참가자 C는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는 청소년 직장인으로, 학내 페미니즘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참가자 D는 게임 내 성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페미니스트가 된 탈학교 청소년이다. 참가자 E는 혜화역 시위와 탈코르셋 운동을 보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며, 숏컷 등 여성성 규범에 저항하는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참가자 F는 자신을 성소수자로 정체화한 것을 계기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다.
'당신의 용기가 나의 결단이 되었듯, 나의 용기가 당신의 결단이 되기를.'
'혼자서는 못했던 말,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말, 같이 합시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간의 연대가 절실하다고 느껴서'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저는 엄청난 용기를 얻을 것 같아요.'
- 청소년 페미니즘 기자단 '소녀, 소녀를 말하다' 지원 동기 中
남성중심사회에 맞서는 여성 청소년의 이야기는 다양했다. 단일한 하나의 서사로 구성되지 않았고, 무력한 '피해자'로 남아있지도 않았다. 저마다 다양한 계기로 청소년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했으며, 다양한 실천 속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같고도 다른 이야기를 연결하고, 확장하기 위한 취재를 고민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스쿨미투, 페미니즘 교육, 가부장제, 탈코르셋, 팬덤문화 등 여성 청소년의 삶을 드러내는 주제가 쏟아져 나왔다.
소소하지만 위대한 말하기
2019년 2월까지 여성 청소년이 직접 기획하고, 취재하고, 작성한 기사가 '소녀, 소녀를 말하다' 연속기고로 게시될 예정이다. 뮤리엘 루카이저는 '만약 한 여성이 삶의 진실을 말하면 세상이 터져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욕망의 대상이 되어 온 이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말할 때, 세상은 바뀐다. 소녀들의 말하기는 소소하지만, 세상을 바꿀 위대한 말하기다. 성인 남성 중심의 담론을 뚫고 나오는 뾰족한 언어다.
스쿨미투, 페미니즘 교육, 탈학교, 가부장제, 탈코르셋, 불법촬영, 팬덤문화, 퀴어운동, 섹슈얼리티, 생애주기까지 총 10편으로 이루어질 기자단의 취재기사에 많은 관심과 일독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