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이유로... 2천만원이 필요합니다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기억하실 겁니다. 벼랑 끝에 몰린 약자들이 보여주는 우정과 연대는 감동적이었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이 쓰라렸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유독 잊히지가 않았습니다. 가진 돈이 떨어진 여주인공 케이티가 마트에서 생리대를 훔치다 붙잡힌 장면이었어요. 돈을 탈탈 털어 먹을 것은 간신히 마련하지만, 생리대까지는 살 형편이 안 되었던 거죠.
최소한의 욕망만을 가질 것을 요구받는, 그래야 겨우 살 수 있는 경제적 상황에서도 월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케이티는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성들에게 월경은 자신의 상황이야 어쨌건 찾아오는 것. 굶을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기에 맞춰 흐르는 피를 처리해 줄 생리대는 필수품입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투덜거리듯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월경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다들 월경은 여성의 문제로만 여기는 걸까?"
그러게요. 엄마들은 초경을 시작한 딸들에게 축하인지 협박인지 모를 '이제 여자가 되었으니 단도리 잘 하라'는 말과 함께 은밀히 생리대를 건넵니다. 그때부터 월경은 '그날, 매직' 같은 암호들로 이야기되고 냄새도, 흔적도, 한다는 낌새도 없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성들만 알죠. 자신이 어떻게 월경을 하는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귀찮은지.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인류 절반이 3000일 넘게 하는데... 왜 쉬쉬하나
문제는 그래서 월경을 이 사회에서 잘 모른다는 겁니다. 월경을 터부시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사회에서 월경은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입니다. 인류 절반이 3000일 넘도록 하는 경험 중에 이렇게 쉬쉬해야 했던 게 또 뭐가 있을까요?
작년 여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생리대 유해물질 논란은 월경에 대해 침묵했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극심한 월경통과 이상 증상을 원래 생리할 때 그런 거야, 내가 운동을 안 해서, 내가 식습관이 안 좋아서, 우리 엄마도 원래 그래서 등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던 여성들이 이 문제가 나의 문제만이 아님을 깨닫고 월경의 사회적 공론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나아가 여성들은 내 몸이 증거다, 나를 조사하라며 정부와 기업에 일회용 생리대 안전성에 대한 책임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덕분에 어디서 기저귀 찬 여자가 강단에 올라오냐는 둥, 생리대라는 말이 듣기 거북하니 위생대라고 말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이 난무하던 한국 사회에 적어도 '생리대' 가 이제는 좀 떠들어도 '거북하지' 않은 말이 된 것 같습니다
"생리와 같은 기본적인 신체 현상을 둘러싼 오명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이 법안은 여성용품을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으로 생각한다."
2016년 뉴욕시의회가 무상생리대 비치 법안을 통과시킬 때 빌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이 남긴 말입니다. 이로써 뉴욕시는 세계 최초로 여성들에게 무상생리대를 지급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뉴욕뿐만이 아닙니다. 케냐에서는 모든 여학생에게 생리대를 무료 지급하는 법안이 발의되었고 미국 위스콘신주, 호주 시드니에서도 공공시설에서 생리대를 무료로 제공하는 법안이 발의되었습니다.
'깔창생리대'와 '무상생리대' 사이
우리나라 역시 저소득층 소녀가 생리대를 구입 못해 신발 깔창을 사용했다는 '깔창생리대' 사건 후 저소득층 10대 여성들을 위한 생리대 지원 사업, 여성 노숙인을 위한 시민들의 생리대 모으기 캠페인 등 의미 있는 일들이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이 소수의 취약계층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생리대가 저소득층에게만 부담일까요? 우리나라의 생리대 가격은 평균 331원으로 OECD 평균보다 두 배 가까이 높습니다. 그마저도 친환경·프리미엄 라벨을 붙이고 더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여성이 평생 월경과 관련해 지출하는 비용이 2000만 원이 넘어간다는 언론 기사가 보도되기도 했지요.
매달 2만 원 정도를 10대 때부터 50대까지 40년간 지출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딘가 그렇게 꾸준히 후원을 했으면 표창감이라도 됐을 만한 일 아닌가요.
여성환경연대는 우리에게도 무상생리대가 있다면 어떨까, 이걸 쓰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궁금했습니다. 서울시에서도 지난 6월 공공기관 화장실에 비상용 생리대 비치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은 바 있습니다. 세금이 정말 필요한 곳에 쓰이지 않고 낭비될 우려가 있음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설문 결과는 찬성이 93%로 압도적이었습니다.
2017년 3월 9일 제주여성인권연대는 도내 여성 28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78.4%가 '생리대 미준비로 곤란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상용 생리대 비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피를 더 잘 흘릴 권리'를 위하여
그래서 우리는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누구나 쓸 수 있으며, 빈 동그라미 안에 여성들의 필요를 담고 싶다는 뜻을 담아 '○○(공공) 월경대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지난 7월 2주간 여성환경연대가 입주해있는 여성미래센터 1층 화장실과 한동네에 있으면서 청소년들 이용 비율이 높은 아하!성문화센터 화장실에 ○○월경대를 비치해두기로 했습니다. 우선 ○○월경대 프로젝트를 알리는 포스터를 화장실 문에 붙이고 변기 근처에 ○○월경대를 넣은 그물주머니를 걸어두었습니다.
이용자들의 의견을 듣고자 큰 종이와 펜도 벽에 붙여두었죠. 월경대가 몽땅 없어지는 거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월경대가 줄어드는 만큼, 사용자들이 남긴 메시지가 늘어갔습니다.
대다수는 '급할 때 쓸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정말 여성들에게 필요한 정책이다'라는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리대가 너무 비싸서 친구가 힘들어한다, 안전하고 저렴한 생리대가 있으면 좋겠다, 생리컵도 무상 제공하라는 글도 있었습니다. 그러게요. 생리컵까지는 어렵고 사무국에 후원받은 면생리대가 있어서 관심 있는 분들은 써보시라 넣어두었더니 금세 동이 나더군요.
공공화장실에 일회용 생리대 말고도 다양한 월경용품이 비치된다면, 본인 상황에 맞춰 그것들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면 어떨까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네요.
월경은 여성 몸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코니 윌리스의 소설 <여왕마저도>에서 나오는 '미친 사람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생리를 일부러 하겠어요!'라는 말이 함축하듯 월경통, 생리 전 증후군 등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월경은 몹시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또한 월경은 여성인 내가 일부러 선택한 일이 아니지만, 돈이 드는 일입니다.
○○월경대가 이 복잡다단한 개개인의 고통과 어려움까지는 해결해주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조금 더 참을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을까요.
당신 역시 학교나 직장에서 갑자기 시작한 월경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있으실 겁니다. 어쩌면 애매하게 가난해서 생리대 한 통 사기가 부담스러웠던 시절도 있으셨을 겁니다. ○○월경대는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한 대부분의 여성들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김보람 감독의 말처럼 여성들에게는 피 흘릴 권리가 있습니다. ○○월경대는 더 잘 피 흘리기 위해, 여성으로서 더 잘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첫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