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욕 먹어가며 엄마가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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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0 15:05
한 여성이 이야기 한다.
"거기가 너무 부어올라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어.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그 놈이 내 이마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빠가야로'하며 못으로 구멍을 내더라니까. 그것들은 인간도 아냐. 일본 군인들은 우리를 조선 보지라고 불렀어.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을 수가 없어. 이 배 흉터? 한번은 내가 애기를 가진 걸 알고 그놈들이 나를 눕히더니 칼로 배를 째고 애기, 그 핏덩어리를 꺼내 바닥에 내리치더라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됐던지 내 자궁까지 드러냈어. 나도 자식 하나 낳아보고 싶었는데 다 글렀지 뭐!"
다른 한 여성이 이야기 한다.
"아니, 일본 전체를 다 준대도 나는 너희를 용서할 수 없어. 어떻게 하냐구? 나를 열 일곱 살의 나로 돌려놔! 딱 그 모습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렇다면 사과를 해! 우리에게 잘못 했다고 사과를 하라고!"
미친 그러나 미치지 않은 한 여성이 이야기 한다.
"아버지가 아들 대신 딸이 끌려가는 게 낫지 않느냐며 꽃신을 사 줬어. 그래서 여기 왔어. 나 이 꽃신 신고 고향 갈 거야."
위 이야기는 영화 '허스토리'에 나오는 위안부 여성(할머니)들의 증언이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스물 세 차례에 걸쳐 열린 관부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관부재판이란 시모노세키의 하관과 부산의 부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야기는 마음 풍경을 밑그림으로 하여 구성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은 위로 받을 이야기가 필요하다.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폐허가 된 마음을 열어 보이며 그 곳에 꽃이 되고 새가 되고 나무가 되어 줄 이야기를 기다린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을 치유해 줄 다른 이야기를 간구한다.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것을 듣는 사람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연대적 행위이다. 인류는 공공선의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들을 통해 늘 이들을 기억하고 북돋우며 지지해왔다.
초로에 들어 선 남성 택시운전사가 말한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무얼 자랑이라고 일본까지 가서 나라 망신시키려는 거야?"
위안부 피해자 아들이 말한다.
"남사스럽게 우리 집에 그런 일 없으니까 다시 찾아오지 마라!"
관부재판 중에 일본 남성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해 야유한다.
"조센징, 돈에 미쳐 있지도 않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히스토리'와 '허스토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남성 시각의 역사는 전쟁과 권력과 지배의 역사이다. 그들이 기록한 내용에는 전쟁을 몇 차례 했는지, 승이었는지 패였는지, 전사자가 몇 명인지에 대한 통계만 있다. 전쟁터로 자식을 보낸 애끓는 어머니의 통한도 없고, 적을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무고한 민간인을 집단학살한 것에 대한 반성도 없다. 사람과 사람에 대한 서사가 없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종전 후 무너진 건물을 재건한다는데, 이런 논리 위에서 세워지는 것들은 다시 파괴를 품은 폐허를 예고할 뿐이다.
여성(성)의 역사는 돌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짐승이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고통에 어떻게 공감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함께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이야기를 이웃의 이야기를 공동체의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 안에는 적의 개념도 승자의 개념도 없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교감하는 동료애가 자리한다.
'이야기 귀신'이라는 옛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도령이 있었는데 이 도령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 즉시 자기가 차고 다니는 주머니에 그것들을 꼭꼭 가둬놨다. 원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널리 퍼뜨려야 하는데 가둬놓으니까 주머니에 든 이야기들이 화가 나 삿된 귀신이 되어 도령을 해코지 하려 했다. 다행히 머슴 덕분에 위기를 넘긴 도령은 그제야 이야기의 참뜻을 알아 널리 퍼뜨렸다 한다.
'허스토리'는 도령이 세상에서 들은 이야기다. 당연히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들은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이야기를 엮고 엮어 멀리 전한다.
자녀들에게서도 같은 민족에게서도 정부에게서도 멸시 받고 냉대 받으면서도 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다듬는 이유는 무얼까? 일본 재판 과정에서 이미 박정희 정권 때 다 보상했다는 그 말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사연을 긴 울음과 분노로 토해내는 이유는 뭘까? 끌려가던 끔찍한 기억을 담고 있는 시모노세키, 다시는 밟고 싶지 않은 공포의 그 항구를 스물 세 번이나 드나들게 만든 동력은 뭘까? 야유하는 일본인들, 그들의 언어가 난무하는 적의 땅에서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법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한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사람의 아픔보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더 중한, 인간보다 돈이 더 귀하다는 자본(제국)주의가 세계 도처에 폐허로 널려있는 이곳에서 그들은 왜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무슨 이유로 나비가 되어 이야기를 나르며 꽃으로 피워내는가.
극 중 박순녀(예수정 분)는 관부재판에서 증언한 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기를 하나 갖고 싶었어. 얼마나 예쁘겠어. 그리고 잘 키우고 싶었어."
여성성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다. 베고, 쳐내고, 쥐어짜고, 그렇게 자연도 인간도 파괴시키고 나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길 없고, 그나마 폐허에서라도 일어나려면 성찰해야 한다. 파괴해 온 그래서 파괴당한 그 이야기들을 공론장으로 불러내지 않고 주머니에 꽁꽁 묶어둘 때 우리 사회에, 지구에 삿된 귀신이랄 수 있는 부정적 현상들이 온난화처럼 우리를 덮칠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임을, 삶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도처에 모여 앉아 이야기 씨앗을 고르고 싹을 틔우며 이야기꽃을 피워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