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오마이뉴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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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13:22
'양공주', '양색시'라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했던 위안부 여성을 일컬었던 멸칭이다. 이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발적 성매매자로 낙인된 미군 위안부들은 박탈당한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발적 성매매의 자발성은 구조적 허위에 불과하다. 당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면 세간의 주장인 '자발성'이 얼마나 허약한지 여실히 드러난다. 전후 부모를 잃은 고아,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소녀 가장들이었으며, 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직업소개소의 사기에 속은 이들도 있다.
이들의 상당수가 미성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설사 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했다하더라도 일단 들어가게 되면 노예나 다름없는 감시와 착취로 그곳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면 인신매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아라고 소녀가장이었다고 다 양공주가 됐느냐고.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남성인 고아나 소년가장이 성노예로 착취당한 역사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미군 위안부들이 '젠더 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의 보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안전한 성생활을 위해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철저히 관리한다. 이것은 일제가 일본군의 성병관리와 주둔지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억제하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관리하던 행태와 같다.
미군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주둔하자 한국정부는 미군을 달러벌이의 화수분으로 삼는다. 민간업자(포주)를 앞세워 미군들을 상대할 여성들을 대거 포집, 곳곳의 기지마다 배치해 달러를 벌어들이게 했다. 외화벌이의 주역인 '애국자'라는 허울을 씌어 오래도록 국가 경제에 복무시키는 동시에, '양공주'라는 낙인을 찍는 '이중 구속'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기지촌은 달랑 윤락업소 몇 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져 있는 마을에 미군과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매개로 한 각종 서비스업이 침투해 들어오며 응집된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을 이용한 돈벌이로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가져다 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노예처럼 등한시됐고, 포주, 업주의 농간과 착취, 주변인들의 차별에 따른 불명예와 소외로 사람답게 숨 쉬며 살 수 없었다. 정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구조적인 착취가 이루어진 것이니, 기지촌 구성원이었던 한 개인의 탓은 아니라고 눙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삶이었다 해서, 동시대를 참담하게 살았던 여성들에 기대 누렸던 개개인의 빚진 삶을 도덕적 성찰 없이 그냥 '모두 다 어려웠던' 시대였다고 봉인할 수 있겠는가?
은폐했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침탈당한 인권에 대한 담론이 충격적으로 촉발된 건 1992년 동두천 윤금이씨 살인 사건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권, 젠더 감수성의 토양이 저급했던 토대에서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윤금이씨의 죽음은, 미군 위안부 여성의 인권유린에 천착하기 보다는 선정적 보도와 함께 '양키 고우 홈'이라는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부정의한 상황을 초래한다.
마치 미군이 없다면 성매매가 사라지는 건강한 성 의식의 국가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윤금이씨 사건을 계기로 각 계 시민단체, 여성인권 활동가, 연구자등이 공론화를 본격화하고, 2008년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침해당한 인권에 국가가 개입, 방조했음을 밝히는 연대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축적된 연구와 자료 발굴로 2014년 미군 위안부 여성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2017년 1심 판결에서 국가 폭력을 일부 인용하는 판결이 나왔고, 2018년 2심 판결에서 국가가 성매매를 조장한 것과 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의 위법성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좀 더 폭넓은 미군 위안부 여성의 인권과 지원을 위해 3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차대전 뒤 '독일인의 여자'가 됐다며 수만 명의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한 국가의 잘못을 "정부 이름으로 사과"한 노르웨이 정부의 행보는 한국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쓸쓸한 노년을 맞고 있는 기지촌 여성들의 건강상태는 동년 여성들에 비해 매우 나쁘다. 게다 '국가 폭력'임이 법원 판결로 인정됐음에도, 자발적 매춘이었다는 오래된 주홍글씨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은폐된 역사에 대한 진실 규명이 절실할 뿐 아니라 고령으로 심신이 위기에 처한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차원에서 시급히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이 지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동맹국이라는 군사적 위치를 빌미로 주둔국에 집창촌을 형성하게 압력을 넣고 자국 군인들의 적극적 성 매수를 도운 미국의 책임은 없는가? 그리고 다시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가지게 된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행한 전시 성폭력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2015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베트남의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위로 그리고 연대의 마음을 전하고자 베트남을 방문했다. 또한 수 년 전부터 민간단체인 한베평화재단은 한국군에 의한 전쟁 폭력 피해자들을 찾아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이는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시 폭력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피해에 대한 우리의 문제 제기는 윤리적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지촌은 다 사라진 걸까? 아니다. 90년대부터 한국 미군 위안부 여성이 대거 빠져나간 자리를 외국인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E6 비자를 받고 공연예술가로 입국한 이들은 실상 대부분 성매매로 생계를 잇고 있다. 외국인 여성들에게 비자를 발급해놓고 업주들이 벌이는 위법을 감시 관리하지 않는 당국은 이들의 성매매를 정말 모르는 걸까?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인 여성들에게 해서 안 되는 일은 그 어느 나라의 여성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을 매개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여성의 몸을 식민화하는 남성들의 공고한 연대는 전쟁이 있는 그 어느 곳에서든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자발적 성매매자로 낙인된 미군 위안부들은 박탈당한 인권에 대해 말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발적 성매매의 자발성은 구조적 허위에 불과하다. 당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면 세간의 주장인 '자발성'이 얼마나 허약한지 여실히 드러난다. 전후 부모를 잃은 고아,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소녀 가장들이었으며, 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직업소개소의 사기에 속은 이들도 있다.
이들의 상당수가 미성년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설사 자발적으로 일을 시작했다하더라도 일단 들어가게 되면 노예나 다름없는 감시와 착취로 그곳을 빠져나올 방도가 없었다면 인신매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아라고 소녀가장이었다고 다 양공주가 됐느냐고.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남성인 고아나 소년가장이 성노예로 착취당한 역사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미군 위안부들이 '젠더 폭력의 피해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의 보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안전한 성생활을 위해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철저히 관리한다. 이것은 일제가 일본군의 성병관리와 주둔지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억제하기 위해 위안소를 설치해 위안부를 관리하던 행태와 같다.
미군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주둔하자 한국정부는 미군을 달러벌이의 화수분으로 삼는다. 민간업자(포주)를 앞세워 미군들을 상대할 여성들을 대거 포집, 곳곳의 기지마다 배치해 달러를 벌어들이게 했다. 외화벌이의 주역인 '애국자'라는 허울을 씌어 오래도록 국가 경제에 복무시키는 동시에, '양공주'라는 낙인을 찍는 '이중 구속'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기지촌은 달랑 윤락업소 몇 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형성되어져 있는 마을에 미군과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매개로 한 각종 서비스업이 침투해 들어오며 응집된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을 이용한 돈벌이로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가져다 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노예처럼 등한시됐고, 포주, 업주의 농간과 착취, 주변인들의 차별에 따른 불명예와 소외로 사람답게 숨 쉬며 살 수 없었다. 정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구조적인 착취가 이루어진 것이니, 기지촌 구성원이었던 한 개인의 탓은 아니라고 눙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내몰린 삶이었다 해서, 동시대를 참담하게 살았던 여성들에 기대 누렸던 개개인의 빚진 삶을 도덕적 성찰 없이 그냥 '모두 다 어려웠던' 시대였다고 봉인할 수 있겠는가?
은폐했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침탈당한 인권에 대한 담론이 충격적으로 촉발된 건 1992년 동두천 윤금이씨 살인 사건이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권, 젠더 감수성의 토양이 저급했던 토대에서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당한 윤금이씨의 죽음은, 미군 위안부 여성의 인권유린에 천착하기 보다는 선정적 보도와 함께 '양키 고우 홈'이라는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부정의한 상황을 초래한다.
마치 미군이 없다면 성매매가 사라지는 건강한 성 의식의 국가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윤금이씨 사건을 계기로 각 계 시민단체, 여성인권 활동가, 연구자등이 공론화를 본격화하고, 2008년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침해당한 인권에 국가가 개입, 방조했음을 밝히는 연대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축적된 연구와 자료 발굴로 2014년 미군 위안부 여성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2017년 1심 판결에서 국가 폭력을 일부 인용하는 판결이 나왔고, 2018년 2심 판결에서 국가가 성매매를 조장한 것과 조직적 폭력적 성병관리의 위법성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좀 더 폭넓은 미군 위안부 여성의 인권과 지원을 위해 3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차대전 뒤 '독일인의 여자'가 됐다며 수만 명의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한 국가의 잘못을 "정부 이름으로 사과"한 노르웨이 정부의 행보는 한국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쓸쓸한 노년을 맞고 있는 기지촌 여성들의 건강상태는 동년 여성들에 비해 매우 나쁘다. 게다 '국가 폭력'임이 법원 판결로 인정됐음에도, 자발적 매춘이었다는 오래된 주홍글씨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에 여전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은폐된 역사에 대한 진실 규명이 절실할 뿐 아니라 고령으로 심신이 위기에 처한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지원을 국가 차원에서 시급히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이 지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동맹국이라는 군사적 위치를 빌미로 주둔국에 집창촌을 형성하게 압력을 넣고 자국 군인들의 적극적 성 매수를 도운 미국의 책임은 없는가? 그리고 다시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가지게 된다. 한국이 베트남에서 행한 전시 성폭력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2015년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베트남의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위로 그리고 연대의 마음을 전하고자 베트남을 방문했다. 또한 수 년 전부터 민간단체인 한베평화재단은 한국군에 의한 전쟁 폭력 피해자들을 찾아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이는 마땅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시 폭력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면, 일본군 위안부, 미군 위안부의 피해에 대한 우리의 문제 제기는 윤리적 우위를 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지촌은 다 사라진 걸까? 아니다. 90년대부터 한국 미군 위안부 여성이 대거 빠져나간 자리를 외국인 여성들이 채우고 있다. E6 비자를 받고 공연예술가로 입국한 이들은 실상 대부분 성매매로 생계를 잇고 있다. 외국인 여성들에게 비자를 발급해놓고 업주들이 벌이는 위법을 감시 관리하지 않는 당국은 이들의 성매매를 정말 모르는 걸까?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인 여성들에게 해서 안 되는 일은 그 어느 나라의 여성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을 매개하지 않은 전쟁은 없다. 여성의 몸을 식민화하는 남성들의 공고한 연대는 전쟁이 있는 그 어느 곳에서든 사라질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