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마저 피하지 못한 출산 경력 단절
오마이뉴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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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18:36
여성 래퍼 제시가 부른 '쎈언니'는 제목처럼 자신이 강한 여성임을 과시하는 노래로, 제시 특유의 음색과 래핑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크게 히트한 곡이다. 가사 중에 '남자들도 쫄지, 론다 로우지'라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도 '-지' 라임을 맞추느라 센 언니의 대표주자 론다 로우지를 소환한 것 같다. 물론 론다 로우지도 더할 나위 없이 세지만 나에게 센 언니라고 하면, 1995년에 프로 무대에 데뷔해서 지금까지 줄곧 남자들은 물론 세상도 쫄게 만든 이가 반사적으로 떠오른다. 그는 바로 테니스 황제 세리나 윌리엄스다.
"저 근육 좀 봐, 여자도 아니야."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스포츠 뉴스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는데, 당시 세리나 윌리엄스와 그의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는 스포츠 뉴스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런데 윌리엄스 자매가 등장할 때마다 남자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들의 압도적인 육체를 보면서 여자도 아니라고 비아냥대거나, 고작 '코트의 흑진주' 따위로 부르며 칭찬하거나. 세리나를 그저 '여자 리그에서 잘 뛰는 흑인 선수' 쯤으로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세리나 윌리엄스라는 존재의 파급력이 그만큼 위협적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리나 윌리엄스는 살아있는 전설이며 누구도 여기에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그는 남다른 정신력과 천부적인 재능으로 자신이 테니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임을 입증했다. 20년이 넘게 이어진 선수 생활 동안 그가 세운 기록은 일일이 열거하기 버거울 정도로 화려한데, 단연 돋보이는 기록은 커리어 골든슬램의 달성이다.
일반적으로 프로 테니스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목표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꼽는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한 선수가 4대 메이저대회(호주, 프랑스, 영국 윔블던, U.S. 오픈)를 모두 석권하는 것을 의미한다. 테니스가 프로화된 이후 지금까지 이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여자 6명, 남자 4명이 전부다. 커리어 그랜드슬램보다도 우위에 있는 기록이 '커리어 골든슬램'인데 이는 4대 메이저 대회 우승에 올림픽 금메달을 더한 것이다.
2003년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세리나 윌리엄스는 시드니 올림픽과 베이징 올림픽에서 비너스와 여성 복식에서 금메달 획득, 런던 올림픽 결승전에서 라이벌인 샤라포바를 꺾고 단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단복식 금메달을 모두 거머쥔 커리어 골든슬래머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커리어 골든슬램을 기록한 선수는 세리나를 포함해서 단 네 명뿐이며, 이것은 그가 성별을 막론하고 현존하는 최고의 선수임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처럼 독보적인 선수도 고난을 겪으면서 성장했다. 세리나는 단지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백인 중심적이고 마초적인 테니스 코트에서 차별을 겪어야 했다. 2001년에 있었던 인디언웰스 마스터스 사건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데, 세리나는 이 대회 4강에서 비너스와 만났다. 하지만 8강에서 부상을 입은 비너스가 기권했고 관중들은 언니가 동생의 우승을 위해서 일부러 기권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결승전이 열린 날, 관중들은 세리나가 실점할 때마다 환호하고 인종차별적인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세리나는 악재에 굴하지 않고 우승했지만, 상처가 너무 컸던 탓에 13년간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그는 자서전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했는데 "나와 혐오스러운 관중과의 대결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고백과 함께.
이처럼 인종차별에도 맞섰던 강인한 그가 최근에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으며 부진에 빠졌다. 세리나는 알려진 대로 2017년 9월 딸을 출산했다. 임신 2개월 때도 호주오픈 우승컵을 따냈던 황제에게도 출산은 커다란 장벽이었다.
그는 출산하기 직전에 출전한 프랑스 오픈에서 16강 전을 앞두고 가슴 통증으로 기권했고 출산 후에는 혈전(혈관에 뭉친 핏덩이)이 문제가 되면서 임신합병증을 앓았다. 절치부심 끝에 지난 7월에 열린 영국 런던 윔블던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황제의 귀환을 알렸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엄마를 위해 뛰었다, 내 테니스 여정은 이제 막 다시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에서 세리나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 경기를 제외하고 완패했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딸에게 좋은 엄마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고 적었고 산후우울증을 토로했다.
흑인 여성,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인 세리나 윌리엄스가 겪은 고난은 모든 여성이 살면서 한 번은 부딪힐 법한 세상의 부조리를 모두 모아놓은 축소판 같다. 실력과 연봉에 있어서 세계 최고인 선수조차도 여성, 특히 엄마를 속박하는 굴레를 피할 수 없다. 단적인 예로 세리나는 출산 직후 랭킹 포인트가 소멸하는 바람에 세계 랭킹 1위에서 자그마치 491위로 밀려났다. (테니스 세계 순위는 최근 1년간 출전한 대회 성적으로 정한다. 세리나는 임신과 출산으로 1년 넘게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애를 낳았다는 이유로 황제가 경단녀가 되는 것만큼 부조리한 일이 또 있을까? 세리나가 남자 선수였다면 아이 열 명을 얻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세리나 윌리엄스를 바라보는 심정이 너무나 복잡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여성이 다시 일어서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가 왕좌를 되찾더라도 그것이 '여성의 부조리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개인의 문제'라는 메시지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출산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며, 엄마의 삶을 사느라 존재가 지워진 여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류 절반의 운명과 관련된 이 중대한 문제가 숭고하지만 심상한 일로 취급받는 것은 그것이 전적으로 여성의 일이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명저 <제2의 성>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이 오늘날 요구하는 것은 남자와 동등한 자격에서 실존자로서 인정받는 것이지, 실존을 생명에, 인간을 그 동물성에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세리나가 그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출산이 곧 커리어의 무덤'인 스포츠계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 건강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호소하고 있고 그로 인해서 여성으로, 엄마로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주목받고 있다. 편견과 기득권의 질서에 맞선 코트의 히로인. 공식적인 기록이 남진 않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세리나가 써낸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