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싸개" "하류로 살아라" 이게 '명문대 클라스'인가
오마이뉴스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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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16:25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만 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게 웬걸. 그 말만 믿고 열심히 공부한 여성들은 학내 성차별과 마주한다. 명문대만 가면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지만, 대학교 입학 후 강성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총여학생회도 없는데 명문대라니.
6월 15일 연세대학교는 '총여학생회 재개편'에 관해 학생 총투표를 했다. 이어 9월 19일 성균관대 또한 '총여학생회 존속에 관한 총투표 실시 안건'을 발의했다. 서울 내 주요대학 중 동국대 이외에 총여학생회(아래 총여)는 실질적으로 없다. 총여가 있어도 '페미(니스트) 낙인'이 두려워 쉽사리 입후보자가 나오기 힘들다.
고려대학교 내 여성주의 단체로는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페미니즘 학회 여정, 특별위원회인 여학생위원회(아래 여위) 등이 활동 중이며 각 단과대별 페미니즘 소모임도 여럿 있다. 하지만 가부장적 학교 분위기는 여전하다. "우리 학교 장점은 총여가 없는 것"이라는 게시글이 익명 게시판에 올라올 정도다.
교내 성폭력적 언사를 고발하는 '고려대 남자들의 사상과 가치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소위 '빻은(성차별적이라는 뜻의 신조어)' 말들을 캡쳐한 글이 가득하다. 인터넷 커뮤니티 고파스, 페이스북 페이지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시간표앱 게시판 에브리타임 등에 올라온 게시물들이다. 여기에는 성범죄 옹호부터 성매매 후기뿐만 아니라 여학생 성상품화까지 언급됐다.
에브리타임 익명 게시판에서도 페미 낙인과 성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다. 익명의 여학우는 1일 기자에게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게시글에 반박 댓글을 달자 '피싸개', '집안일하며 걸레질하고 남편 돌아오면 무릎 꿇고 짐 받아드려야지', '평생 남자 밑에서 하류로 살아라' 등 폭언 쪽지가 쏟아졌다"며 "그 충격으로 앱 사용을 잠정적으로 중지한 상태"라고 털어놨다.
페미니즘 거론했더니... 쏟아진 폭언
'단톡방'에서도 성폭력을 찾을 수 있다. 같은 과 남학생 단톡방을 목격한 익명의 학생은 "진짜 더럽다"고 평가했다. 어느 과 단체 채팅방에서는 한 여학생이 "간호사 페티쉬" 발언을 여성간호사의 성상품화라고 비판하자 남학생들 단톡방에서 그를 조롱해 인권위원회가 열리는 사건이 있었다. 정경대 후문의 게시판에도 '단톡방 성희롱'을 고발하는 대자보가 그동안 여럿 있었다.
교수도 예외는 아니다. 강의 평가 홈페이지에는 "교수님이 빻은 말을 하신다, 피하라"는 종류의 글이 종종 올라온다. 재학생들에게 묻자 남교수의 여성혐오 고발이 쇄도했다.
"미투운동 때문에 조교에게 무슨 말을 못하겠다", "(화장품 광고를 언급하며) 여배우 A는 이제 아줌마니까 넘어가고, 여가수 B는 이 화장품을 쓰고 탱탱해졌대~ 그런데 B는 원래 탱탱하잖아", "여자의 적은?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이거 또 녹음하는 것 아니야? 여자의 적은 교수님이지", "여자의 몸은 아름답기 때문에 남자 예술가의 뮤즈가 되어야 한다" 등의 발언이다.
이밖에도 학생들은 "여성의 임신·육아 때문에 남성을 뽑을 수밖에 없다"는 남자 교직원, 학교 행사 뒤풀이에서 "여자니까 술 한 잔 따라보라"는 남자 선배, 사적인 술자리에서 "여자가 없어서 술맛이 안 난다"고 말한 남학생, 일상적인 외모 평가 등을 성차별적 경험으로 꼽았다. 이렇듯 온라인, 오프라인, 수업시간, 뒤풀이, 교수, 교직원, 선배, 동기를 막론하고 학내 성폭력은 만연하다.
2일 기자가 직접 고려대 재학생 3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여성·기타 성별의 답변자 26명 중 21명이 대학내 성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반면 남학생은 8명 중 1명만이 그랬다. 다만 그는 "겪은 것은 맞지만 큰 임팩트가 없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남학생 중 단 한 명만 "성차별 경험했다"는 이유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른다. 혹은 겪었어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자신에게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니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든 남학생이 '총여가 필요하지 않다'고 응답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 간단한 설문조사로도 젠더권력이 명백하게 보인다. 왜 교수의 '빻은' 말이 여학생들에게만 들리는가? 왜 선배의 '빻은' 말을 여학생들만 기억하는가? 같은 말에 상처받는 것은 왜 여학생들뿐인가?
여성혐오는 약자 입장에서 공감하고 신경 써야만 알 수 있다. 우리가 남성중심 사회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직접 성차별을 경험한 적 없고 공감하지 못하며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명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한 총여의 존폐를 논할 자격이 없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총여에 대한 의견으로 가장 많이 나왔던 것은 "원래 있는 기구로도 충분하다"였다. 학내 여학생위원회나 인권센터로도 성폭력 관련 대응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 재학생은 성폭력 문제를 제대로 다뤄줄 총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성차별적 발언을 신고했을 당시 2차 가해가 있었다"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도 하지 않았고 신고자의 신원 보호 또한 보장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한 기존 기구로는 체계적인 성폭력 대응이 어렵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성폭력 사건이 만연한 것이다. 특히 '여학생위원회'는 명칭 때문에 학생들이 총여학생회 역할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위는 특별위원회로, 내부에서 대표를 정한다. 여학생들이 직접 투표로 회장을 선출하는 학내 자치기구인 총여와는 성격이 다르다.
고려대에는 여성주의 단체가 여러 개 있고 안희정 무죄판결 등 사안에 연대 대자보를 쓰기도 하지만, 구심점이 되는 단체가 없다. 총여는 존재 자체로 학내 여성의제를 많이 도출시키며 여권 신장에 도움이 된다. 여러 단체가 총여를 중심으로 연대한다면, 소수자가 지금보다 편하게 인권침해 사례를 고발할 수 있다.
그런데 설문조사 응답자 중에는 "타학교 총여의 사례 때문에 총여 반대"라는 의견을 낸 이도 많았다. 연대 총여가 특정 강사를 초빙한 이후 폐지 여론이 거세지고 비난이 심해지자 운영진이 자진 사퇴한 사건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 우리는 대통령직 존폐 여부를 의논하지 않았다. 그 직의 정당성은 이미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총여도 마찬가지다. 총여 운영진이 특정 사안으로 사퇴했다고 해도 총여 자체의 실효성이나 존폐를 논하는 것은 비약이다.
성평등한 사회가 오면, 총여는 소멸한다
사실 총여를 폐지해야 한다는 움직임은 11년 전부터 있었다. 2007년 경희대 총여는 학내 남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당 교수가 재판에서 무혐의를 받자 남성들이 총여를 폐지해야 한다며 심각한 비방을 한 사건이 있었다. 같은 해 연세대도 "극단적인 페미니즘 운동으로 외면을 받는다"는 이유로 총여를 폐지하고자 학생 총투표를 하겠다고 밝힌 적 있다. 돌아보면 그것들은 성평등한 사회를 두려워해서 미리 훼방을 놓는 행위, 백래시였다. 11년이 지금은 어떨까?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여성주의 단체들이 '안희정 무죄 판결 규탄 릴레이 대자보'를 썼다는 학내 기사의 댓글 상황은 2007년 경희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현재 연대 총여는 사실상 폐지 여부를 묻는 '재개편' 투표 결과, 찬성 의견이 82.24%를 차지했다. 2007년과 마찬가지로 총여 활동이 "극단적 페미니즘"이라는 비난과 함께 실시된 투표였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남성중심의 학내 문화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총여는 성평등한 사회가 오면 스스로 소멸한다. 총여의 목표는 커다란 권력을 계속 영위하는 게 아니라 성평등한 사회에서 소멸하는 것이다. 학내 성폭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소수자 모두가 총여는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때 비로소 총여가 없어질 당위성이 생긴다.
연세대와 하는 정기전 패배는 공개적으로 사과하지만 총 3번의 학내 몰래카메라 사건에는 입을 닫는 학교, 여자를 성적대상화하는 교수, 여성이라고 임원 전화를 끊어버리는 선배, 총여 폐지를 주장하며 '메갈X'이라고 비난하는 학생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이게 바로 총여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