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이 되어 불꽃처럼 살다간 망각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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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8:24
문재인 대통령이 호명한 항일여전사
99돌을 맞는 3・1절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들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그 중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이름도 있었다. 박재혁, 최수봉, 동풍신, 윤희순, 남자현, 정정화, 박차정이 그들이다.
그나마 정정화 여사와 남자현 여사는 대중에게 조금은 알려진 인물이다. 정정화 여사는 독립군자금 모금을 위해 수차례 국내에 잠입했던 항일독립지사이다. 임시정부를 뒷바라지 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장강일기>(長江日記)를 남긴 분이다.
남자현 여사는 영화 <암살>의 저격수 안옥윤(배우 전지현)의 모델로 매스컴을 탔던 열혈투사이다. 그렇지만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전문가나 역사교사가 아니면 무척 생경한 인물들이다. 동풍신은 3・1만세 운동 당시 함경북도 명천 시위를 주도한 항일지사이고 윤희순은 최초의 여성의병장이다.
나머지 박재혁, 최수종, 박차정은 모두 의열단 단원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불꽃처럼 살다가 짧은 생을 민족해방에 바쳤다는 사실이다. 박재혁은 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 계획(1920)이 변절자의 밀고로 실패하자 부산경찰서장을 폭살시킨 인물이다. 당시 거사에 참여한 의열단원 대부분이 피검된 장소가 부산경찰서였다. 그리하여 의열단 동지들이 받았을 악형과 수모를 되갚아주기 위해 하시모토 경찰서장을 현장에서 준열히 꾸짖고 폭살시켰다.
선혈이 낭자한 폭살 현장에서 중상을 입고 체포된 박재혁은 일제가 주는 물과 음식을 일절 거부한다. 그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술 뜨지 않은 채 그대로 곡기를 끊고 절명한다. 박재혁 열사가 순국할 당시 나이는 26살이었다.
부산경찰서장을 폭살시킨 지 3달 뒤엔 밀양경찰서에 또다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한다. 최수봉은 의열단 동지들을 고문한 일제 경찰과 제국주의 일본을 응징하기 위해 폭탄을 던진다. 그러나 살상에 실패한 채 일경에 체포돼 27살의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최수봉은 1심 재판 당시 검사의 사형 구형에 '좋소'라고 웃으며 담대했던 인물이다. 검사의 사형구형에도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일본인 검사는 불복하여 항소한다. 항소심 일본인 판사의 사형언도에 최수봉은 미소를 지으며 의열단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제국주의 일제 타도! 민족해방을 위한 장도에서 대의를 위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열혈청년들의 기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박차정 역시 조선의용대 대원이자 부녀복무단장으로서 일본군과의 교전 도중 어깨에 총상을 입고 부상후유증으로 순국한다. 전장에서 입은 총상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계속 근거지를 이동하다가 상처가 악화되면서 마지막 귀착지인 충칭에서 순국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박차정의 나이는 34살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한 지 50년이 지난 1995년에 가서야 박차정에게 훈장이 추서된다. 유관순이 받은 훈장인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는 유관순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만큼 박차정의 삶은 불꽃처럼 치열했다.
광복이 되던 해 약산 김원봉은 아내 박차정의 유해와 피 묻은 속적삼을 지닌 채 환국한다. 밀양 출신 의열단장 김원봉은 조국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밀양시민의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그러나 약산은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을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통한의 눈물이었다.
약산은 자신의 고향 밀양군 부북면 감전리 뒷산에 아내의 유골을 묻으며 통곡했다. 1945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유해가 안장되던 그 순간 약산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유해 안장 후 핏덩이가 말라붙은 속적삼을 갖고 약산은 아내 박차정의 고향 부산을 찾았다. 5남매 막내이자 박차정의 바로 아래 동생인 박문하에게 속적삼을 고이 건넸다.
한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은 박차정은 과연 누구일까? 보통 사람들에겐 망각의 인물이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에겐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아내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보다 식민지 시절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불살랐던 인물로 우리는 박차정의 삶을 복기하고자 한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 침공과 뭇솔리니, 히틀러, 프랑코 등 파시스트 세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다. 따라서 중국관내 항일 독립운동세력도 그 즈음 통일전선체 결성에 머리를 맞댄다. 김원봉의 의열단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신한독립당이 통합돼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약칭 민혁당)이 결성된다.
당시 박차정은 민혁당 부녀부 주임 겸 서기부장으로서 이청천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남경조선부녀회를 조직한다. 박차정은 남경조선부녀회 성명서를 통해 "조선의 여성 해방이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조선의 혁명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통해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할 때 조선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다고 천명한다.
박차정은 나라가 망하던 해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용한은 개화기 지식인으로 신식 근대문물을 접한 항일우국지사였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제국 탁지부 소속 주임 측량기사였다. 그러나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등 식민지 수탈정책이 가속화하자 자신이 하던 일에 심각한 회의를 품게 된다. 더구나 조선 민중들의 싸늘한 눈초리 속에 측량기사로서 하던 일을 중단한다.
아버지 박용한은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유서 한 통을 남기고 자결한다. 망국의 슬픔과 일제의 식민통치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죽음으로써 항거한 것이다. 1918년 1월 아버지의 죽음은 8살 어린 박차정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17살 큰 오빠 박문희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독립운동가 박문희의 신학교 진학에는 그런 가족사의 아픔이 배어 있다.
어머니 김맹련 여사 역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5남매를 강하게 키웠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어렵게 이으며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의 지조와 정신을 잃지 않았다. 김맹련의 고종사촌 동생이 히못 김두봉이다. 주시경의 수제자로서 한글학자이자 김일성 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분이다.
1940년대 초 항일정치단체인 조선독립동맹 의장이자 해방 후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은 약수 김두전은 6촌 동생이고 모두 부산 동래 출신들이다. 따라서 김두봉은 박차정에게 외당숙이고 김약수는 외재종숙인 셈이다.
박차정의 외가 쪽 가계가 항일운동가 집안으로 어린 시절 박차정에게 민족의식으로서 항일의식을 자연스럽게 심어주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1924년 14살의 박차정이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그런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친가 쪽도 마찬가지이다. 부산, 동래지역 청년운동,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이론가이자 실천적 지도자였던 박공표(일명 박일형) 역시 박차정에게 숙부로서 친척이었다. 박차정에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친 박일형은 당시 부산, 기장, 동래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이론가였다. 20살 박차정에게 변증법적 유물론 등 사회주의 사상을 소개했던 실천적인 항일투사로 박차정에겐 사회·민족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박차정이 부산, 경남지역 항일민족교육의 중추이자 요람인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것은 1929년 3월이다. 일신여학교는 부산 경남지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이자 해방 직전까지 부산 경남지방 최고의 여학교였다. 일신(日新, Daily-New)이라는 이름은 '매일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이다. 개화기 여성교육이 홀대 받던 시절 여성들도 교육을 받고 나날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에서 호주 여성선교사 멘지스(B. Menzies)가 1895년 설립한 학교이다.
1893년 3명으로 시작한 고아 소녀들이 1895년 13명으로 늘어나자 호주 여선교사들은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소학교 과정의 학교를 설립했다. 3년 과정의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09년 총독부 학부의 허가를 받아 3개년의 고등과가 개설되었고 1925년에는 동래 일신여학교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박차정은 동래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일신여학교 스트라이크, 바로 맹휴 사건에는 항상 박차정이 있었을 정도로 맹휴 사건과 박차정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중심인물이었다.
1929년 3월 박차정은 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우등으로 졸업한다. 4회 졸업생 21명 중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졸업 직후 박차정은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및 근우회 동래지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열정적으로 활약한다. 특히 1929년 5월 경북지방에 심각한 가뭄 재해가 발생하자 신간회 동래지회와 근우회 동래지회, 그리고 동래청년동맹과 동래노동조합 등 4개 단체로 경북기근구제회가 발족된다. 여기서 박일형은 서무 업무를 맡고 박차정은 재무 업무를 전담할 정도로 졸업 후 박차정은 곧바로 사회활동에 성큼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1929년 6월 근우회 제2기 대의원대회에서 근우회 전형위원,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돼 근우회 본부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한다. 근우회 2기는 사회주의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은 시기이자 지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확장된 시기였다. 박차정은 부산, 동래지회에서 맹활약한 활동 경력에 힘입어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리고 근우회 본부에서 조직선전부와 출판부 업무를 담당하면서 활동무대를 서울로 옮긴다.
어린 시절 박차정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은 큰 오빠 박문희이다. 박문희는 일본 유학 후 부산 동래 지역 민족운동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박문희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1927년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 본부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할 정도였다. 박문희는 의열단 국내 비선책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장인 매제 김원봉과 여동생 박차정을 만나고 돌아온다.
그리고 1932년 의열단이 세운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난징 근교) 입교생 모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부산지역 청년운동과 노동운동가 5명을 의열단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입교시킨 인물이다. 이 일로 박문희는 1934년 1월, 일경에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한다.
마지막으로 박차정의 삶과 투쟁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갖게 한 인물이 세 살 많은 둘째 오빠 박문호이다. 박문호는 의열단원으로서 서대문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악한 고문을 받고 27살에 순국한 항일투사이다. 일찍이 중국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과 부설교육기관인 레닌주의 정치학교에 깊숙이 관련된 인물이기도 하다. 박차정은 박문호의 권유로 1930년 3월 경 중국 망명을 기획한다. 박차정이 의열단에 입단하고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결혼하게 된 계기에는 둘째 오빠 박문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박차정은 어린 시절 항일의식을 작품으로 표현해 교지에 실은 적이 있다. 일신여학교 교지 <일신>(日新) 제2집에 실려 있는 '철야'(徹夜)라는 단편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독립투사인 아버지가 감옥에서 죽은 이후 주인공 남매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냉대 속에서도 추운 겨울 밤을 이겨낸다는 내용이다.
작품 내용 가운데 등록금을 내지 못한 남동생이 풀이 죽은 채 입루 속에서 읊조리는 대사가 나온다. '내일까지 등록금 안 내면 담임 선생님이 퇴학시킨대...' 이는 민족이 처한 고난의 현실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당시 박차정의 나이 15살 때였다. 자신의 어린 시절 고단한 생활을 민족의 고난과 연결 지은 자전적인 작품이다. '철야'는 불굴의 항일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15살 박차정의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문학소녀로서 박차정의 문학적 감수성은 18살 때 쓴 작품 '개구리 소리'에서도 돋보였다. 언니 박수정이 사범학교를 나와 사천, 양산 등 경남지방 교사생활을 전전하다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박차정은 언니의 죽음 앞에 가눌 길 없는 슬픔을 시 한 편으로 승화시킨다. 1928년 일신여학교 교지에 남긴 '개구리 소리'가 바로 그 작품이다.
"天宮에서 내다보는 한 조각 半月이 고요히 大地 위에 비칠 때 우리 집 뒤에 있는 논 가운데는 뭇 개구리 소리 맞춰 노래합니다. 이 소리 들을 때마다 내 記憶이 마음의 香爐에서 흘러 넘쳐서 悲哀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未知의 나라로 떠나신 언니, 개구리 소리 듣기 좋아하더니 개구리는 노래하건만 언니는 이 소리 듣지 못하고 어디 갔을까!"
젊은 나이에 홀연히 세상을 떠난 언니를 그리워하면서 쓴 시인데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인다.
박차정은 뛰어난 선전 조직가이자 광주학생운동 서울 2차 시위 핵심 인물
무엇보다 박차정은 조직과 선전 활동에 뛰어난 자질을 간직했던 것 같다. 일신여학교 맹휴 당시 일경의 집요한 감시를 뚫고 야밤에 노파로 변장한 채 집집마다 방문하여 맹휴를 조직, 지도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1929년 6월 근우회 2기 집행부 구성 당시 박차정이 중앙집행위원 겸 중앙상무위원 그리고 조직선전부장과 출판부장의 직책을 맡은 것도 그러한 능력을 인정받은 때문이다.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서울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박차정은 적극 개입한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서 1930년 1월에 발생한 서울지역 2차 학생시위(일명 근우회 사건)를 핵심적으로 지도한 배후 인물이었다.
당시 근우회 중앙지도부가 서울지역 학생시위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박차정은 허정숙과 함께 서울지역 학생 시위를 직접 지도한다. 근우회 조직선전부장 박차정과 서무부장 허정숙은 서울지역 여학생 시위가 서울 전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도록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높이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한다.
그리하여 박차정은 일신여학교 후배인 이화여고보 기독교학생회 회장 최복순을 비밀리에 만나 서울지역 2차 시위를 기획한다. 1930년 1월에 발생한 서울지역 2차 학생시위는 여학생이 중심이 되었다. 이날 시위에는 이화여고보 310명, 동덕여고보 190명, 배화여고보 200명, 경성여자상업학교 282명, 숙명여고보 406명, 정신여학교 93명 등 서울지역 11개 여학교 전교생이 대부분 참여하였다. 이는 1929년 12월 서울지역 1차 학생시위가 남학생 중심이었던 것에 대한 깊은 반성의 결과였다.
일제 경찰은 서울지역 2차 시위의 배후로 박차정과 허정숙을 지목한다. 결국 근우회 본부 상부지도층이 풀려났음에도 박차정과 허정숙은 보안법 위반으로 구금된다. 박차정은 서대문경찰서에서 경찰 신문을 받을 당시 임신 불능 상태가 될 정도로 극악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서대문경찰서에서 풀려났지만 한 달 동안 병자처럼 누워 지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몸이 심하게 상한 상태였다.
석방과 구금이 반복되면서 박차정은 요양 차 오빠 박문희의 집과 부산 동래를 오간다. 다시 동래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면서 박차정의 몸 상태는 20살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 박차정은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의열단 관련자와 비밀리에 접촉하게 된다. 박차정은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사찰 속에 국내에서 민족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중국 망명을 기획한다.
1930년 3월 어느 날 박차정은 급히 옷가지 몇 벌과 간단한 채비로 일경의 감시를 따돌리고 제물포항을 통해 중국 상하이 망명에 성공한다. 제물포항에서 인육시장으로 팔려가는 여인들 틈에 끼어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한다. 박차정은 외당숙 김두봉과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곧바로 조선공산당 재건설 동맹 중앙부 위원으로 선임된다. 망명 전 국내에서 활동한 박차정의 항일투쟁 전력을 높게 인정받은 때문이다. 제국주의 식민통치 시절 박차정은 일제의 첩보망을 피하기 위해 박철애, 임철애, 임철산 등 가명을 사용했다.
철애는 박차정이 일신여학교 시절 썼던 단편소설 <철야>의 주인공 이름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박차정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중국 항일전선에서 박차정은 한동안 와병 중이었다. 조선공산당 재건 동맹 부설학교인 '레닌주의 정치학교' 일을 도와주는 것 이외에 박차정은 1930-1931년 동안 뚜렷한 행적이 없다.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거나 심각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와병 중이었음은 분명하다. 1930년 2월 서대문경찰서에 피검돼 받은 고문의 악형 때문이었다. 여성으로서 임신이 불가능할 정도이자 20살 나이임에도 석방 후 한 달 간 누워 지낼 정도였다.
이러한 사실은 의열단 군관학교 출신으로 상해에서 공작을 벌이다 체포된 의열단 상해파견 책임자 김공신의 경찰신문조서에서 확인된다. 김공신은 1934년 8월 20일 경 남경으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상해 상황을 공식 보고한다. 그리고 와병 중이던 박차정의 간병을 며칠 간 맡으며 남경에 머물렀다는 경찰 신문조서가 그러하다. 당시 경찰신문조서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박차정의 모친이 직접 상해를 방문하여 김공신의 도움으로 와병 중이던 박차정을 만나는 극적이고도 감격스런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한 손에는 메가폰, 다른 한 손에는 총검을 쥔 항일여전사
중국으로 망명한 지 1년이 지난 1931년 3월 박차정은 베이징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한다. 이후 박차정은 건강이 허락되는 한, 남편 김원봉과 혁명사업을 함께 했다. 김원봉이 1932년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여성 독립군의 정치교양과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당시 박차정은 임철애라는 가명으로 여성독립군을 양성했는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가도 작사했다. 다음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가의 일부이다.
"조선에서 자란 소년들이여! 가슴이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에서 뛴다."
1937년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 본토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제2차 국공합작과 함께 중국관내 항일운동단체의 통일전선체 결성 움직임 또한 활발하게 전개된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 민족해방운동자 동맹'(김성숙)과 '조선 혁명자연맹'(류자명)과 연대하여 1937년 12월 한구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한다.
박차정은 한구에서 개최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다. 그리고 임시정부 특사로 중국국민협회에 파견되어 라디오 선전활동을 수행한다. 라디오 선전활동은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이 동아시아 평화를 깨뜨리는 만큼 민족협동전선의 강화와 한중연합에 의한 항일역량의 집중, 그리고 중국, 일본, 조선의 민중이 단결하여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난징을 함락하자 김원봉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무한으로 옮겨 군대를 창설한다. 역사적인 조선의용대의 창설로 중국 관내 최초의 항일무장 군사조직이 탄생한다. 1940년 창설된 중경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선 1938년 10월 10일에 창건되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박차정은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여성대원 모집과 여성대원 교육을 전담한다. 당시 박차정이 지휘, 통솔했던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소속 여자대원은 22명이었다.
박차정은 조선의용대 각 지대를 지원 방문하여 물품조달과 함께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일제와의 전투에서 박차정은 항상 총검과 확성기를 손에 쥐고 선봉에 섰다. 민족해방전쟁의 도상에서 자신에게 엄격했지만 대원들을 친동생처럼 그리고 때론 친언니처럼 따뜻하고 자상하게 돌보았다. <20세기 신화>, <해란강은 말하라>, <격정시대>를 쓴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조선의용대 시절을 회상하며 박차정의 인간적인 면모를 회상한 적이 있다.
해방된 지 50년이 지나서 박차정은 뒤늦게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여성독립운동가로서는 유관순 열사에 이어 두 번째이다. 그렇게 된 연유에는 민족 분단이라는 정치 환경이 그동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차정의 남편 약산 김원봉이 걸출한 독립운동가임에도 북을 선택한 월북자라는 딱지가 작용한 때문이다.
해방된 지 50년 되던 해인 1995년 박차정은 조선의용대 항일여전사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2001년 3월 부산시 금정구 만남의 광장(동래여고 옆)에 박차정 열사의 동상이 세워졌다. 2005년 7월엔 동래구 칠산동에 박차정 열사의 생가가 복원되었다. 2008년엔 부산 동래문화회관에서 '항일여성독립운동가 뮤지컬 박차정'이 공연되었다.
2010년은 박차정 열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박차정 의사 숭모회'에서는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계획하였지만 부산시와 금정구청의 관심 부족과 예산문제로 공식적인 추모행사도 없이 흐지부지 지나가버렸다. 2008년부터 추진된 박차정의사 기념관 건립공사 문제 역시 70억 원에 달하는 공사비를 마련하지 못해 진척이 없다.
박차정 열사의 조카 박의영 목사(72세, 부산 가나안 교회 목사)는 고모인 박차정 열사를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보다는 거친 들꽃과 같은 삶을 선택한 항일여전사였다"고 일갈하였다. 그나마 2018년 4월 보훈청은 박차정 의사 생가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는 소식이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2020년은 박차정 열사 탄생 110주년 되는 해이다. 조촐한 기념행사나 박차정 열사를 기리는 기념학술대회 정도는 있어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