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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 직후, 그들이 한결같이 한 말은...

성폭력 피해 직후, 그들이 한결같이 한 말은...

오마이뉴스 0 8,396

['미투는 졸업하지 않는다' 이전 기사]

①"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날 성추행한 선배가 말했다

② 성추행 당한 여성 교수는 왜 대학을 나와야 했나

③친했던 동기의 성추행, 피해자는 '잊기로 했다'

④원치 않던 스킨십, 왜 가만히 있었냐고요?

⑤교수에 성추행 당한 후배, 우리는 함께 싸웠다

 

4개월 동안 만났던 취재원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라고. 그들은 성폭력 피해 직후를 이렇게 떠올렸다.

1화 주인공 예린도 "누구한테 신고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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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건을 겪었던 당시 나이는 21살이었다. 성추행 사건을 처음 마주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동안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느꼈던 문제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인 저는 도망치지 않았어요."

2018년 1학기, 예린은 철학과 학생회장(현 철학과 비상대책위원회)이 됐다. 자신이 겪었던 성추행 문제를 학과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싶었다. 

예린이 학생회장으로 돌아온 건 그녀가 겪은 불미스러운 일이 재발하는 걸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저는 학교로 돌아왔을 때 저보다 후배나 친구들 걱정이 앞섰어요. 제2의 이예린, 제3의 이예린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어요."

학생회장이 되자마자 그녀는 학과 내 집행부 산하에 '인권부'를 설립했다. MT나 학술답사와 같은 학과 행사에서 혼숙을 금지하고, 자투리 시간에는 안전 및 성교육을 진행하도록 추진했다. 성추행 사건 직후, 즉각 신고를 할 수 있게끔 온·오프라인 신고처도 마련했다.

"저도 성추행 피해를 겪지 않았다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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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가 졸업할 수 없는 이유

실제로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들은 예린과 같은 문제에 처해있다.

첫째, 피해자 보호장치가 부족하다

학내 성폭력전담기구는 허울뿐이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대학교 성희롱·성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상담직에 전담인력을 배정한 비율은 전체 대학의 7% 정도에 불과하다. 또한 2015년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전국 95개 대학의 성폭력 전담기구 상담원을 설문 조사한 결과, 상담기구 종사자의 53.7%는 기간제 계약직이었다.

둘째, 가해자를 지지하는 문화다

조사과정에서 피해자를 탓하는 질문들이 그 예다.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 삼거나 저항 여부를 캐묻는 건 조직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가부장적 통념에 기반한다.

<강간에 대한 가부장적 통념>

◆ 여성이 저항하는 한 강간은 매우 어렵다. 
◆ 따라서 여성이 온 힘을 다해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남성이 그 저항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제압했을 때 강간의 범죄가 성립한다.
한인섭,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 바꾸기 운동, 한국성폭력상담소, 2007

이러한 통념으로 인해 가해자는 면피를 받고 피해자가 자책하게 된다. 성폭력을 용인하는 문화가 굳어지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대학 생활은 씨족사회다

성폭력 사건 이후에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멀리하기 쉽지 않다. 피해자는 '선배니까, 친구니까, 실수였으니까' 등의 이유로 자신의 피해를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대학 내 성폭력 문화는 뿌리가 깊다. 그렇기에 예린과 같이 개인의 의지로 학과 내부의 변화를 일으키는 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한 학과만의 변화로 대학 내 성폭력 문화를 뿌리 뽑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책임자인 교육 기관은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책임을 저버린 교육부

지난 4월 4일 교육부는 '긴급대책'을 마련했다. 교육부는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단'을 만들어 기관별 성폭력 근절 추진 상황을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또 대학 내 담당 기관이 피해자를 지원하여 2차 피해를 방지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교육부가 비판을 피하긴 어렵다. 미투 운동에 떠밀려 뒤늦게 마련한 궁여지책이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학교 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성폭력이 꾸준히 발생해왔다는 걸 고려했을 때 교육부의 대책은 늑장 대응이라 볼 수 있다. 

실례로 교육부 홈페이지의 '성폭력 신고센터'는 미투 이전인 2015년에 만들어졌다. 신고 건수는 2015년 2건, 2016년 19건, 2017년 7건에 불과했다. 반면 교육부가 발표한 학내 성범죄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대학에서 적발돼 보고된 성폭력 건수가 320건이다. 적발된 성폭력 사건의 수보다 신고 건수가 현저히 적다. 이는 교육부가 성폭력 대응과 예방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2008년에는 1998년에 설치했던 교육부 내의 '여성정책담당관실'이 폐지됐다. 여성정책담당관실은 대학의 성폭력·성희롱 사건처리 매뉴얼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하지만 현재는 교육부 산하 민주시민교육과에 초·중등학교 양성평등 교육을 담당하는 한 명의 직원밖에 없다.
출처 : 이미정·장미혜·김보화, 대학 내 성폭력·성희롱 예방을 위한 제도 개선방안 연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2012


대학은 성폭력에 취약하다. 대학은 유독 학업, 진로, 생활,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엮여있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대학 내 성폭력은 피해자의 생활과 학업을 직접적으로 침해한다. 반면, 그동안 교육부가 마련한 대책은 소극적 차원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학교와 교육부로 대표되는 책임자가 그 책무를 다하지 않을 때, 피해자는 고립된다. 고립된 피해자는 가해자를 상대로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연대 : 피해자의 생존 전략

교육부가 손 놓고 있는 동안 직접 나선 피해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연대했다.


'전국미투생존자연대'(이하 미투 연대)는 미투 피해자인 남정숙 교수가 설립한 단체다. 2018년 3월 27일 발족해 갓 100일이 넘은 연대지만, 그동안 거쳐 간 피해자만 60~70명에 달한다. 미투 연대는 생존자의 자조 모임으로서 피해자들끼리 성폭력 사건을 스스로 해결하고 치유하는 곳이다.

미투 연대는 이름부터 기존의 단체들과 다르다. 그들은 '생존'을 택했다. 죽음으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미투 운동 이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살아남아' 또 다른 피해자를 돕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 회원은 "개인이 회사나 학교 조직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경험한 후로 미투 연대에 참여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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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연대가 가장 중시하는 건 '피해자 구제'다. 상담 및 의료 지원, 언론 대응, 사법 처리 등을 지원하는 데 힘쓴다. 법원, 노동청 등 피해자가 원한다면 어디든 피해자와 함께 대동한다. 피해자끼리 힘을 합치면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웬만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무고로 역고소를 당해요. 그걸 빠져나올 수 있냐는 개인의 역량이나 운에 달렸어요. 하지만 미투 연대는 다른 사람의 피맺힌 경험을 알고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익명의 회원의 인터뷰 中)

피해자 연대를 위해 힘쓰고 있는 미투 연대지만, 재정적 부담은 피해갈 수 없다. 15명의 회원은 사비로 미투 연대를 운영하고 있다. 법률, 의료 지원 및 언론대응, 연구 및 홍보 업무를 상근 인원 없이 회원끼리만 운영해 가고 있다.

"국가 기관이 피해자 구제에 주체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피해자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미투 연대 남정숙 대표의 인터뷰 中)

남 대표는 끝으로 피해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사건 이후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있다고 느껴질 때 제일 힘들어요. 하지만 함께 싸우고 울어줄 생존자들이 있으니 이제 겁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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