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vs. 여혐 아님' 이분법을 나는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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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뉴페미', '영영페미', 혹은 '헬페미'다. 2015년 여름 메르스갤러리 사태, 2016년 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2017년 여름 다시 왁싱샵 여성살해 사건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가 빚어낸 참사들을 순차적으로 겪으며 우리는 '페미니즘 모먼트'를 맞았고 '코르셋'을 벗었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지 않았고, 경험적으로 받아들였다. 때마침 엠마 왓슨은 'HeforShe' 캠페인을 통해 "페미니즘의 정의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고, 페미니스트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테드(TED) 강연에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어딘가 모르게 일상이 제약되는 불편함을 겪고, 비슷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차별당하며 자라고 살아온 우리들은 직관적으로 이러한 정의를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페미니즘은 우리의 일상을 훨씬 더 낫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금세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이즘'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란 꽤 무게가 있지만, "성차별주의자 아니면 페미니스트"라는 레토릭이 대유행했다. 우리는 용기를 얻었다. 이제 우리가 페미니즘에 대해 첨언할 때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하고 운을 떼는 일은 드물어졌다. 모두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곧 "나도 페미니스트지만"의 시대가 펼쳐졌다.

더 이상 페미니즘은 높은 장벽 너머의 무언가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아직 이 사회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산 증거다. 어째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하여 여성학 관련 학위나 활동 경력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에겐 참고문헌도 없고, '선배 페미'도 없었다. "100인에게 100가지 페미니즘"이 있다는 슬로건과 함께 록산 게이의 저서 <나쁜 페미니스트>가 잘 팔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건 여성혐오"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에게 "나는 여자 좋아하는데 내가 왜 여성을 혐오하겠느냐"는 대답을 들었다. 많은 이들은 말하는 우리에게 '메갈', '남혐충' 딱지를 붙였다. 우리가 직접 메갈리아 홈페이지를 열성적으로 사용했는지, 아닌지, 남성혐오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을 직접 사용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우리는 남자친구나 남편이나 직장동료를 만나도, 법적 공방에 휘말려 경찰과 변호사를 만나도 "나는 메갈은 아니지만", "나는 남혐을 하는 게 아니라" 하고 곧잘 변명해야 했다. 곧 어떤 변명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믿고 거르는 한국 페미니즘' 같은 다소 서구중심주의에 젖은 편견적 반응부터 "이제는 세계적으로 페미니즘이 아닌 이퀄리즘이 대세"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론 날조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자가 '여성을 혐오하여 소개팅을 안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하고 쉽사리 착각하는 남성들의 다양한 반응에 부닥쳤다. 몰이해는 무수히, 이해는 적게 돌아왔다.
 

진실을 마주한 후, 어제와 오늘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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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우리는 "입이 트이"고 싶어했다. 우리의 말을 쉽게 무시하는 주변을 향해 더 세게 말하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 '미러링'을 했고, 거기서 더 보태어 말하기 위해서 뭔가를 더 읽고 듣고 싶어 했다. 우리는 장바구니에 페미니즘 서적을 담았고, 각 인터넷 서점 '사회과학 분야'의 베스트셀러에는 '여성/젠더학' 도서가 줄이어 올라갔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강의를 듣고 싶어했고, 각종 여성단체들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폭발적으로 많은 수의 개론 강좌를 열었다. 그 무렵 많은 이들이 찾아 읽은 것이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혐오에 대한 이론서다. 우리는 '여성혐오'가 뭔지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직관했고, 그녀의 이론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리는 진실을 마주했다. 여성혐오의 역사는 5000년이다. 이 세상의 모든 주류적인 것은 여성혐오적이다. 그러고 나니, 온 세상은 '여혐'과 '여혐 아님'의 이분법 속에 강력하게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제와 오늘의 세상은 더 이상 같지 않았다.

우리는 머리를 짧게 잘라달라고 하면 우선 단발을 권하고, 우리의 뒷머리를 짧게 쳐 달라고 부탁해도 '바리깡' 대는 것을 주저하는 미용사를 만난다. 면접을 볼 때 화장을 안 해도, 너무 진하게 해도 안 되는 것은 물론, 바지 정장도 입으면 안 된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다. 우리는 '여성적'인 것은 대부분 불편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팔십 년대 후반부터 구십 년대 초반생 여남의 성비가 곧 우리가 겪은 사회를 상징했다. 공무원인 아버지, 전업주부인 어머니, 언니, 남동생을 두고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 공대 출신 남편과 결혼하여 '맘충'이 된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우리였다.

이제 우리는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껏 좋아한다고 생각해 왔던 긴 머리가 가방끈 사이에 끼어서 걸리적거릴 때, 남자친구나 남동생이 5분 만에 머리를 감고 털어 말리는 동안 나는 거의 30분씩 걸려 샴푸와 트리트먼트를 마치고 또 30분을 드라이기와 씨름해야 할 때, 하이힐을 신은 거울 속의 내 다리가 마음에 들어서 지하철역 계단 앞 거울에서 쳐다보다가도 승강장 계단에서 곧잘 발을 헛디뎌 발목이 꺾이고 달리지는 못할 때, 우리는 그것들의 불편함을 깨달았고, 그것들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여혐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닐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혐'과 '여혐 아님'의 이분법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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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나의 이야기다. 모든 것이 블랙홀 같은 '여혐'과 '여혐 아님'의 이분법 안에 빨려 들어가는 혼돈의 시기를 거치던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외출하기 전엔 몇 번이나 거울을 바라보면서 나의 복장이 페미니스트다운지, 아닌지 걱정했다. 예뻐 보이는 '셀카'를 찍고 싶은 이 마음이 제대로 된 욕구인지, 아닌지를 고민했다. '외모 코르셋'을 벗자고 하면서 긴 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는 스스로가 모순적이어서 우스워 보이지 않을지 걱정했다.
 
실제로 다른 페미니스트에게 "필터 뽀얗게 해서 눈 똥그랗게 뜨고 셀카 찍는 게 가증스럽다"고 평가받은 일도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페이스북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신상 정보를 털고 악플을 다는 가계정에게서는 내 얼굴을 그려놓은 프로필 그림에 대해 "그림이 이 정도로 못생겼는데 실물은 상상이 가냐"는 평가를 받았다.

이게 다 불과 일 년 전의 이야기다. 이제야 말할 기회가 생겼지만, 두 가지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첫 번째로, 나라고 맨 얼굴에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외모주의 타파'를 외치는 페미니스트로서 가장 이상적으로 보일 만한 모습이라는 걸 몰라서 안 한 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나처럼 화장하고 힐을 신은 모습이 아니었다. 실은 무서워서 못한 것이다.
 
두 번째로는, 나 역시 다른 페미니스트가 '여혐'의 구조를 강화시키는 아이돌을 좋아하고 선망하는 것을 비난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저렇게 현실에서 동떨어진, 부자연스럽게 이상화된 인간상을 선망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나쁘다고 생각했다. 치렁치렁하게 세팅한 머리로 높은 힐을 신고, 총체적으로 불편해 보이는 복장으로는 출 수 없는 춤을 추고 꾸며낸 애교있는 목소리로 무해함을 갈망하는 노래를 하고 사랑받는 젊은 여성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전시하고 다수가 소비하는 이상 '여성해방'은 요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갈리아가 탄생하기 불과 두세 해 전까지, 나는 특별한 날 사진을 찍겠다고 라섹한 눈에다가 억지로 서클렌즈를 끼워 넣곤 했다. 각막을 깎아서 곡률이 달라진 눈에 렌즈를 끼우면 렌즈는 안구에 밀착되지 않고 동동 떠다니며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눈동자가 흐리멍덩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정말로 과장이 아니라, 엄청나게 가난하다. 그런데도 20대 초반에 엄마는 나를 눈이 침침한 할머니 의사 선생님이 계시는 피부과에 보냈다. 나는 거기서 할머니 의사 선생님이 마취 연고를 듬성듬성 발라 주는 바람에 통증이 제법 느껴지는 채로, 오징어 타는 냄새를 맡으며 눈에 띄는 얼굴의 점을 다 빼는 시술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도 내 피부톤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피부에 비해 충분히 균일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속부터 차오르는 물광" 피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집 밖에 나갈 때면 늘 비비크림을 발랐다.

나는 키가 작아서 수능이 끝나자마자 줄곧 힐을 신었다. 어느 날 엎드려서 책을 보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허리가 너무 아파서 울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울고 있으니까 같이 있던 애인이 병원에 데려다 주었고,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허리의 디스크가 약간 눌려 있고 이제는 힐을 신으면 매우 안 좋다는 얘길 들었지만 학교 단체의 회의를 주재하러 가야 할 때는 힐을 신었다. 그러고는 걸어 다닐 때 양쪽에서 부축을 받는 코미디를 연출하였다.

메갈리아가 생기던 즈음엔 어쩌다 보니 깨달은 바가 있어 전면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글을 쓰고 오프라인 발언도 하게 되었지만, 나의 그 콤플렉스들이 한 번에 떨어져 나가진 않았다. 내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에 수수한 차림을 한 외관을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면 그 때문에 만만해 보이진 않을까, 외모로 공격받을 때 내가 너무 상처받진 않을까, 그런 게 무척 고민이 되었다. 나는 사회가 '못생긴 여성'에게 퍼붓는 공격을, 그녀들이 받는 대접을 너무 잘 알았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알면 뭐하나, 내 생각의 변화와는 달리 사회의 기준은 그대로였고 그 온도차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그때 "우리 선생님들은 다 얼굴 보고 뽑았다"는 직장 상사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돈을 주는 사람들은 내 머릿속에 든 것을 얼마나 신뢰할 것인지 여부를 겉으로 보이는 요소들로 평가했다. 요약하면, 나는 어두운색 긴 머리에 적당한 화장을 하고 적당히 굽 높은 신발을 신으며 단정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어서 이 사회에 '어른스러운 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외관을 유지해야 했다.
 
"죽은 것처럼 살고 싶진 않다", 이게 '나의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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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생각도 조금, 처지도 조금 바뀌었다. 나는 지금은 내 맨 얼굴이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서른이 넘은 대졸자인 내게는 꾸밈 노동이 덜 강요되는 일자리가 주어졌다. 더하여, 불특정 다수에게 팔리는 연애 시장에 입찰될 필요가 없어졌고, 강경화 장관처럼 멋진 스타일의 나이 든 여성이 얼마나 매력적일 수 있는지를 눈으로 보아서 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의 외관을 곧이곧대로 못 보고 '괴물'처럼 보게 되는, 이른바 '신체 이미지 왜곡' 현상을 겪는 십대 여성은 열 명 중 세 명이다(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제9차 청소년건강행태 온라인조사 결과).

실은 나는 '코르셋' 때도, '코르셋'을 벗어갈 때도, 지금도, 그렇게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아니었고, 아니다. 그저 무난하고 평범한 축에 끼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봄, 여름, 가을에는 꽤 유행에 따르는 예쁜 옷도 입었지만, 겨울옷을 고를 때 내 기준은 간단했다. 무난한가? 따뜻한가? 두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게 내 겨울옷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 외투는 몇 해째 '빨간 패딩'이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내가 겨울마다 입는 이 '빨간 패딩'을 못 견뎌 하는 '패셔니스타'들이 많다. 그녀들에게 옷은 자기 표현의 큰 수단이고, 옷을 멋지게 입지 못하게 하면 삶의 의미를 곧 잃어버릴 것 같은 사람도 있다는 걸 그녀들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만일 청자켓과 니트 가디건, 두 벌의 상의를 내게 주면 가디건은 안에 입고, 자켓은 밖에 입어야 한다는 수순이 당연하게 떠오르는데도 그 둘을 거꾸로 입어버리기도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옷이라는 것도 내가 글을 쓸 때 단어와 문장을 배열하듯이 자유자재로 배열하여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이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밥을 먹으러 가면 국에 머리카락을 빠뜨릴 만한 길이지만, 별로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다.

검열에 대해서 생각하면,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는 요즘 여성 주인공이 서사를 이끄는 창작물을 즐겨 본다. 제니퍼 로렌스가 '캣니스 에버딘' 역으로 주인공을 맡은 영화 〈헝거게임〉은 무척 흥미로운 서사다. 이 영화의 마지막 시리즈 '더 파이널'에서야 존재가 밝혀지는 판엠의 13구역은 독재자 스노우가 다스리는 '캐피톨'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군 대통령 코인이 지배하고 있다. 다른 12구역은 모두 캐피톨의 지배하에 있고, 각 구역에서 자란 아이들은 매년 여남 한 쌍이 '공물'로 바쳐져 전 구역에 방송되는 가운데 서로를 죽고 죽이는 상징적인 게임인 '헝거게임'을 하게 된다.

내가 거기서 주목하게 된 것은 12구역의 헝거게임 추첨 담당자이자 캐피톨에서 나고 자란 '패셔니스타' 에피다. 그녀는 캐피톨 주민답게 체제의 도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나 이 체제가 어딘가 잘못됐다는 것쯤은 안다. 자신이 게임장으로 데려 온 주인공 캣니스를 끔찍이 아끼는 정 많은 구석도 있고, 호들갑스러운 매력이 있는 그녀는 곡절 끝에 캣니스와 함께 혁명을 기도하는 중인 13구역으로 가게 된다. 

13구역의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빚어낸 첨단 유행의 형형색색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개성 있는 메이크업을 한 사람들로 가득 찬 캐피톨의 사람들과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다. 모두가 똑같은 투박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가발도 쓰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에피는 괴로움을 호소한다. 그곳의 방은 똑같은 크기와 디자인의 방공호다. 그녀는 스스로를 숙소에 자발적으로 구금하며 밖에 나가기를 괴로워한다. 자유를 찾는 사람들 속에서 마치 '전쟁포로'가 된 것만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혁명을 위하여 만인의 평등을 표방하는 13구역은 과연 모두에게 천국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앞서 서술한 '패셔니스타'는 나의 친구이자 공저자 오빛나리다. 그녀와 나는 이러한 고민의 시절을 함께 했다. 그녀는 작년 즈음을 기하여 만사가 여성혐오의 도식에 빨려 들어가고 마는 여러 사례들을 게임 '오버워치' 분석글을 통해 비평하며 "여혐, 여혐 아님의 이분법 사이로 우리가 놓쳐버리는 재미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표현한 바 있다. 나는 지금도 이 의견에 적극 동의한다.

지금, 나는 '여혐' 아니면 '여혐 아님',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면 '페미니스트'라는 단순 이분 도식을 거부한다. 그 사이에는 좀 더 다층적인 정체성들이 존재하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그 시점에 우리의 실천이 끝나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페미니즘'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더 남아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페미니즘을 내려놓지 않고 좀 더 꾸준히 해 보기로 한 내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가진 모든 욕망이 '빻은 욕망'이며 '가부장제가 허락하는 무엇'이라는 표현으로 일축되어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게 될 것은, 재미없는 세상이다.

나는 여성이다. 나는 여성이자 페미니스트로 살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물론, 여성혐오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렇지만 죽은 것처럼 살고 싶진 않다. 나는 살아 있다. 기왕 죽지 않았고 어차피 살아가는 바에야, 좀더 재미있게 살고 싶다. 가부장주의의 바깥을 뚫고 나오는 송곳들은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앞으로 페미니즘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을 더 많이 상상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게 나의 페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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