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브래지어 입고 한강에서 외쳤다, "난 잡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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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한 지역신문에 지역 경찰서 경위의 기고글이 게재됐다. '단정한 옷차림, 여름철 성범죄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은 '여름철 여성들의 노출이 성범죄자들의 성욕을 자극하니 단정한 옷차림으로 스스로를 지키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성폭력의 발생 원인을 남성중심적 관점으로 해석한 이 글은 성폭력 피해자와 직접 대면하고 피해자 진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해야 할 경찰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안겼다. 지역 여성단체를 비롯해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경위가 소속된 경찰서와 문제의 기사를 최종 승인한 언론사에 항의했고, 문제의 기사는 결국 비공개 처리되었다.


이는 단지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진 한 경찰관만의 문제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2011년 캐나다로 가보자. 그날은 토론토의 요크 대학교에서 캠퍼스 강간 사건과 관련한 안전 교육 강연이 있던 날이었다. 강연자인 지역 경찰관 마이클 생귀네티(Michael Sanguinetti)는 "잡년처럼 헤픈 옷차림을 피해야" 안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이 한 마디는 훗날 21세기의 성공적인 페미니즘 운동으로 평가받는 '슬럿워크(Slut Walk)'를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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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이후 6년이 지난 2017년의 한국, 여전히 여성의 옷차림이 성범죄의 원인이라는 인식을 가진 경찰과, 그 기사를 게재하도록 용인한 언론사가 있다. 검찰의 <2016 범죄분석〉에 의하면 2015년 한 해 성폭력 발생 건수는 3만 1063건에 이른다. 그중 신원 미상의 피해자를 제외하고 여성이 피해자인 범죄는 90퍼센트에 달하는 2만 7959건이다.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그가 받게 되는 질문은 사건 발생 당시의 옷차림뿐 만이 아니다.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는 않았는지, 취해 있지는 않았는지, 평소 연애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등. 성폭력 책임이 피해자에게 돌려지는 데에는 수만 가지 구실이 있다.


보호받아 마땅한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에서 출발한 질문을 받게 되는 순간,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들은 전형적인 피해자상에 부합되기 위해 자/타의적으로 복장을 구속당하고, 통행시간을 규제당하고, 방정한 행실을 요구받는다. 이는 어떤 시간에 무엇을 입고 또 무엇을 할지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시민적 권리의 명백한 박탈 효과를 불러일으킴은 물론이다.


그래서 또다시, '슬럿라이드(Slut 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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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야하게' 입고 있든 아니든,
늦은 밤, 술을 마시고 있든 뭘 하고 있든,
성폭력은 범죄를 저지른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 <페미몬스터즈> 슬럿라이드(Slut Ride) 홍보 문구 중


지난 2일 오후, 페미몬스터즈의 '슬럿라이드(Slut Ride)' 참가자 모두는 원하는 대로 입고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 모였다. 어떤 참가자는 반팔에 긴 청바지를 입었고, 또 어떤 참가자는 검은 브래지어 차림이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몸을 게시판 삼아 성폭력에 대한 통념에 저항하는 문장을 적었다. "잡년 만세", "내 몸은 포르노가 아니다.", "잡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Don't judge me!(나를 판단하지 마!)", "슬럿 민주주의", "이게 정치다."


자전거를 타기로 선택한 것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1880년대만 해도 여성들은 자전거를 마음껏 타지 못했다. 자전거를 오르내릴 때의 '여자답지 못한' 동작과 '거추장스러운' 의복 문제로 손가락질을 당했다. 심지어 헐렁한 바지인 '블루머'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은 '폭주족'이라고 비난받았다(네이버 지식백과 '자전거, 여성에게 자유를 주다' 참고). 우리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되었던 사회적 규범에 저항하겠다는 의미로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수많은 시민이 애인, 가족과 함께 나들이 나온 가을의 한강공원을 신명 나게 달리던 와중, 뜻밖의 캠페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영등포 경찰서의 몰래카메라 예방 캠페인이었다. "몰래카메라, 신고가 예방입니다"라는 구호가 한강공원 화장실마다 붙어 있었던 것이다. 몰래카메라를 근절하자는 취지의 캠페인임에도 불구하고 슬럿라이드(Slut Ride) 참가자들 중 그 캠페인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문구를 보고 떠올랐던 질문이 이것이었던 것이다. "몰래 찍는 걸 어떻게 신고하라는 말이지?"

 

여성의 몸은 누구에 의해, 어떤 이유로 '단속'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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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구의 함정은 몰래카메라 범죄 예방의 의무를 피해자 혹은 잠재적 피해자들에게 지우면서 교묘히 가해자를 가리고 있다는 점이다. 담배케이스 몰카, 안경 몰카, 펜 몰카 등 온갖 초소형 장비들이 아무 규제 없이 유통되고 있는 상황이다(관련 기사 :

[영상] 1시간 만에 '탐지기도 소용없는 몰카' 살 수 있다?). 심지어 몇 달 전 몰래카메라 촬영을 이유로 징역을 살던 수감자가 자신의 촬영은 "예술행위"라며 위헌소송을 진행한 일도 있었다.

 

때문에, 몰래카메라 범죄 예방을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몰래카메라가 범죄'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몰래' 찍는 걸 피해자가 용케 알아내 신고하기 전에 말이다. 우리는 자전거를 세우고 해당 캠페인 문구를 "몰래카메라, 촬영은 범죄입니다"라고 고쳐 적었다.


라이딩을 마치고 자전거를 반납하려던 도중 한 경찰관이 우리를 잡아 세웠다. 여성들이 노출이 과한 옷을 입은 채 몸에 선정적인 글씨를 쓰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애들도 많은데..." 그는 '신고가 들어왔기에 출동할 수밖에 없다'며 주의를 주고 자리를 떠났다. 가장 노출이 심한 참가자조차 해수욕장에 가면 흔히 볼 법한 짧은 반바지에 가슴을 가린 옷차림이었으므로 나는 이 신고의 이유가 과연 노출 때문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운동장에서 운동을 마친 한 무리의 남성 무리가 웃통을 벗어젖힌 것을 보았던 기억이 스쳤다. 그때 내 주위의 그 누구도 그 몸에 집중하지 않았고 다만 곁을 지나던 한 중년의 남성만이 "어이쿠, 보기 좋다"며 지나갔다. 그 몸이 '건강한 몸'으로, 우리의 몸은 '불온한 몸'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인가?

 

'인간'임을 외치기 위해 '괴물'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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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10번출구'는 2016년 5월 강남역에서 있었던 여성살해사건을 계기로 생겨난 여성주의 그룹이다. 한 여성의 죽음에 대한 동일시와 비애, 분노로 출발했던 '강남역10번출구'는 1년 2개월이 지나 올해 7월 이름을 바꿨다. '페미몬스터즈'. 죽음에 대한 슬픔과 두려움을 넘어, 성(性), 계급, 인종, 장애여부 등 인간에 대해 차별적으로 부과되는 규범과 억압에 그야말로 '괴물처럼' 맞서겠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었다.  


슬럿라이드(Slut Ride)를 했던 그날, '괴물'은 '잡년(Slut)'이 되었다. 옷차림, 시간, 행실 등을 기준삼아 성폭력 피해를 당할 만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분하는 사회에서 한강공원에 모인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나는 잡년"이라고 외쳤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입맛에 맞춰 멋대로 구획한 '성녀/창녀' 이분법에 더 이상 말려들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잡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슬로건처럼. 그리하여 슬럿라이드(Slut Ride)에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이것이다.


"우리는 그냥 인간이다"라는 것. '어떤' 여자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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